고조선과의 문화적계승관계를 다시 확증/남포시에서 새로 발굴된 고구려벽화무덤

벽화의 기본주제는 사신도, 축조시기는 6세기경

조선신보에 따르면 최근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남포시민족유산보존사의 연구집단이 남포시 룡강군 은덕지구에서 사신도주제의 고구려벽화무덤을 새로 발굴하였다.


북쪽방향에서 본 무덤전경

무덤은 200여기의 고인돌무덤이 집중분포되어있는 석촌산의 남쪽기슭인 은덕지구북쪽의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곳에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룡강큰무덤과 쌍기둥무덤이 있다.


무덤입구. 돌문에 손잡이가 달려있다.

무덤은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졌는데 무덤칸으로 들어가는 안길입구에는 화강석판돌을 다듬어 만든 대문형식의 돌문이 서있고 돌문들에는 쇠로 만든 고리형손잡이가 붙어 있다.

비교적 잘 남아있는 깨여진 돌문의 높이는 125cm이고 너비는 60cm이며 두께는 9cm이다.

쇠로 만든 고리형손잡이의 직경은 10cm이다.

안길은 안칸의 남벽중심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있고 안칸은 평면정방형을 이루었으며 바닥에는 서쪽으로 치우쳐 장방형의 낮은 관대가 놓여 있다.

돌문에 쇠로 만든 손잡이, 《학술적의의 매우 크다》


서쪽벽 벽화 “백호”

벽화의 기본주제는 사신도이다.

벽화가 제일 잘 남아있는 서벽에는 붉은색의 안료로 눈을 강조한 머리와 길게 누운 듯한 몸통, 솟구쳐오르다가 구부러든 꼬리가 달린 백호가 형상되어 있으며 발굴과정에 나온 벽화조각들가운데는 범이나 개와 같은 짐승의 머리와 앞다리가 형상된것과 말의 허리뒤부분이 그려져 있는것도 있고 무덤칸천정굽도리에 그렸던 넝쿨무늬가 그려진 조각도 있다.


무덤칸에서 나온 관못

무덤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당한 탓으로 관대우에서 관못 1개만이 발견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고학학회에서는 새로 알려진 고구려벽화무덤의 발굴정형을 심의하고 이 무덤이 룡강일대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사신도주제의 고구려벽화무덤으로서 그 축조시기가 6세기경이라는것을 확증하였다.

학회에서는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벽화무덤들가운데서 이 무덤처럼 쇠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대문형식의 돌문이 그대로 남아있는 무덤이 흔치 않은것만큼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 특히 매장풍습 등을 연구하는데서 그 학술적의의가 매우 크다는데 대하여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의의는 첫째로 고조선과 고구려사이의 문화적연관성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고대 및 중세초기의 역사와 문화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무덤이 발굴됨으로써 고인돌무덤이 많기로 유명한 룡강일대가 고조선뿐아니라 고구려시기에도 매우 중시된 정치적 및 문화적거점의 하나였으며 따라서 고조선과 고구려사이의 밀접한 문화적계승관계를 다시한번 확증하게 되었다.

또한 룡강군일대에서 순수 사신도주제의 벽화무덤이 새롭게 발견된것은 이 일대가 매우 안정된 고구려의 정치군사적거점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지난 시기에도 이 일대에서는 룡강큰무덤과 쌍기둥무덤, 옥도리벽화무덤과 같은 고구려벽화들이 발견되였지만 이 무덤들은 모두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무덤들로서 인물풍속도가 위주로 되고 사신도는 부주제벽화로 형상되어 있었다.

이번에 순수 사신도주제의 벽화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인물풍속도로부터 사신도에로의 이행과정이 이 지역에서도 다른 고구려지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나아가서 고구려가 이 일대를 장악한 이래 그 어떤 외부세력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고 굳건히 지켜온 중요한 정치군사적거점의 하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의의는 둘째로 고구려의 매장풍습과 주택생활풍습을 연구하는데서 매우 귀중한 현물자료라는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벽화무덤들가운데서 이 무덤과 같이 돌문이 있는 무덤은 고국원왕릉과 내리1호무덤뿐이다.

그런데 내리1호무덤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수적폭격으로 무덤구조와 벽화가 많이 파괴되어 그 원상을 찾아볼수 없으며 고국원왕릉의 돌문에는 손잡이를 달았던 흔적만이 있을뿐이다.

그러므로 이 무덤에서 발견된 쇠로 만든 고리형손잡이가 달린 대문형식의 돌문은 유일하게 현존하는 손잡이가 달린 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죽은 다음에도 현실세계와 꼭같은 집에서 산다는 관점에서 실제한 대문을 형상한 돌문을 달아놓던 고구려사람들의 매장풍습과 당시의 살림집들에서 어떤 형태의 대문들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현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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