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노안도(蘆雁圖)/견본수묵/
잔잔한 물결을 배경으로 기러기 두 마리가 갈대밭에 숨어서 갈대를 물고 달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깊은 밤은 달은 혼란한 세상을 의미하고 갈대를 문다는 것은 보신책을 강구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좀처럼 수용되지 않았다.
[노안도(蘆雁圖)와 노안도(老安圖)]
노안(蘆雁)이란 한자를 해석하면,
蘆(노, 로)-갈대
雁(안)-기러기
기러기와 갈대가 함께 붙은 한자는 함노(銜蘆), 즉 ‘갈대를 물다’, 혹은 ‘갈대를 물고 있는 기러기’라는 의미이고, 이는 중국 고사에서 ‘난세에 보신책을 강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그림은 노안도(蘆雁圖)가 아니라 노안도(老安圖)로 읽고 쓴다.
‘편안한 노후생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사실 기러기와 갈대를 그린 그림을 보고는 도저히 작품의 내용을 유추할 수가 없다.
이는 글자와 발음을 가지고 뜻을 만든 전형적인 ‘문자유희’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자의 나라 중국, 학문의 나라 조선의 정서가 투영되어 독특한 형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문자유희는 사물의 쓰임새나 생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직관은 전혀 먹히지 않고 오직 관념으로만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배우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란 말이다.
아무튼,
작품의 내용이 ‘난세의 보신책’에서 ‘편안한 노후’로 바뀐 이유는 뭘까?
조선시대 선비, 문인, 양반은 반드시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했다. 한 번 가진 정치적 입장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바꾸면 지조와 절개를 버렸다고 비난한다.
이런 비난을 받으면 정치적 생명은 끝난다.
따라서, 자기 안위를 위해 난세를 회피하고 몸을 사리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는 당시 선비들이 가졌던 철학 문제이다.
난세(亂世)는 이기적 욕망이 만들어 낸다.
공동체를 파괴하여 그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부리는 난동이다.
이런 세상에서 몸을 사리고 도망가는 사람은 공동체를 위한 도심(道心)을 버린 것과 다름없다.
또한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는 싸움은 회피할 수도, 끝낼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난세의 보신책’이란 내용은 유학자인 선비들에게 수용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러기와 갈대그림은 조선의 정서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일단 애매한 관념성을 버리고 생태를 이용하여 내용을 재구성했다.
기러기는 생뚱맞게 물고 있던 갈대를 내려놓음으로 ‘보신책’의 의미를 버렸다.
또한 갈대숲을 따뜻한 남쪽으로 설정하고, 갈대꽃은 인생역정, 백발 따위의 직관적 개념으로 바꾸었다.
화제(畫題)는 편안한 노후를 뜻하는 노안도(老安圖)가 되었다.
당시 노인은 존경의 대상이었고, 효의 상징이었다. 또한 장수하는 일은 사회적 경사로 축하받았다.
노안(蘆雁)과 발음이 동일하면서도 전혀 다른 뜻의 그림이 된 것이다.
노안도(蘆雁圖)가 만만한 그림이 아니듯이, 노안도(老安圖)도 그저 ‘편안한 노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솔직히 늙음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병들고 쇠락한 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치매와 희미한 기억과 회한은 그야말로 고통의 도가니이다.
이런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그림이라기 보다, ‘편안한 노후란 이런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노안도(老安圖)를 보면서 상상해 보자.
기러기는 추운 북쪽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어렵고 힘들게 내려왔다.
어떤 놈은 앞장서서 길잡이를 했을 것이고, 어떤 놈은 지친 동료를 달래가며 함께 날았을 것이다.
무리를 이탈한 놈도 있고, 기력이 딸려 포기하거나 굶어 죽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무리 지어 이동하는 기러기떼는 공동체의 상징으로 보아도 된다.
또한 추위, 배고픔과 싸우며 먼 길을 이동하는 것은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비의 상징일 것이다.
그렇게 다다른 남쪽은 따뜻하고 포근한 둥지에 먹이도 풍부하다.
먼길을 오느라 기러기는 갈대꽃처럼 백발이 되었다.
이곳에서 새끼를 낳고 키우며 더 나은 미래를 꿈꿀 것이다.
노후의 편안함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뼈 빠지게 노력한 후에, 풍족하게 자라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느끼는 안도일 것이다.
[허주 이징/노안도/비단에 수묵/144*77.2/개인소장]
이징(李澄)은 조선 중기에 활동한 왕족이자 화가이다.
겨울 추위를 피해 먼 길을 비행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철새의 이미지는 오랜 세월을 힘들게 살아온 늙은이의 인생역정과 비슷하게 연결된다.
또한 갈대밭에 앉아 있거나 쉬고 있는 기러기는 노인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쉬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기러기떼는 공동체, 추운 북쪽은 난세, 긴 여정은 싸움, 따뜻한 남쪽은 태평성대, 갈대꽃은 백발…
이렇게 유추할 수 있다.
글 심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