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읽기] 2. 봉건의 역사 속에서 꽃 피운 혁명의 불길

[러시아 읽기] 2. 봉건의 역사 속에서 꽃 피운 혁명의 불길 – 러시아 역사와 민중 투쟁

러시아 벌판, 광활한 대륙, 우리는 러시아를 부를 때 ‘대륙’이나 ‘벌판’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는다. 러시아의 총면적은 1,707만 5,400km², 남북의 길이가 2,500~4,000km이고 동서가 9,000km에 달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눈 빈대떡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 조각이 러시아가 차지하는 몫이다. 그래서 러시아 땅으로만 지구를 거의 한 바퀴를 돌고 러시아를 횡단하면 열 한 개의 시간대를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라고 하면 또 어떠한 것들이 생각날까?

모스크바, 마트료쉬카, 소련, 톨스토이, 볼쇼이 발레, 시베리아 벌판 등 갖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린 아직 러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 러시아에 대해 얘기를 하면 소련을 기억하시는 분들로부터 “러시아? 거기 소련 아니야? 빨갱이 나라.”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2000년대 들어와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시베리아 가스를 끌어오는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러시아가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이 사실이다. 이에 러시아라는 숲을 다 보여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러시아를 정확히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 9회에 걸쳐 [러시아 읽기]를 연재한다.

2. 봉건의 역사 속에서 꽃 피운 혁명의 불길

민중 투쟁의 씨앗 : 루스의 역사 들여다보기

현재 러시아를 구성한 최초의 민족인 슬라브인의 조상들은 200년 무렵부터 500여 년 동안 지금의 루마니아와 체코, 슬로바키아에 걸쳐있는 카르파티아산맥 동북쪽 산림 지대에 정착해 살았다.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라틴, 앵글로-색슨, 발트 민족 등과 함께 유럽 대륙의 주요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잦은 외세의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가게 되면서 서슬라브인·남슬라브인·동슬라브인 3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서슬라브인은 오늘날의 폴란드·체코, 슬로바키아·소르비아인에 속하고, 남슬라브인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불가리아·몬테네그로인에 속한다. 그리고 동슬라브인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스인에 해당된다. 즉, 동슬라브인이 러시아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주인공이었다.

러시아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은 북유럽 발트해 연안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온 상인들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이들을 ‘노르만족’ 또는 ‘루스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킹’들이다.(이하 ‘루스인’) 이들은 사실 국가를 건설할 마음은 없었다. 루스인들은 그저 가장 부유한 도시로 알려진 비잔티움 제국을 눈독 들이며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을 했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힘이 약했던 슬라브인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9세기 중엽 슬라브족들 내부에 분란이 자주 일어나면서 오히려 슬라브인들 스스로 루스인 지도자에게 자신들의 통치자가 되어 질서를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이에 루스인의 지도자였던 ‘류리크’가 슬라브인들이 사는 노브고로드 지역에 공국을 세웠다. ‘류리크’의 사망 이후 다음 지도자였던 ‘올레그’가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기면서 882년 ‘키예프 루스(키예프 루스 대공국이라고도 부른다)’를 건국했다. 이후 키예프 루스는 988년 블라디미르 1세 때 동슬라브 부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동방정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는 계승권 투쟁과 내부 분쟁으로 세력이 약화하고, 1237년부터 본격적으로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124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키예프 루스 © 이인선 통신원

몽골인들은 루스 땅으로 직접 들어가진 않았다. 대신 몽골 원정군을 이끌던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볼가강 하류의 사라이 지역에 본영을 정하고선 동슬라브를 다스리는 전초기지로 정했다.(‘킵차크 칸국’이라 부른다.) 이후 볼가강 유역 초원지대의 투르크계 유목 부족으로서 몽골인들의 원정에 직접 참여하고 그들에게 충성하는 ‘타타르’ 유목민들이 몽골인의 위세를 빌어 동슬라브인들을 지배했다. 이렇게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스 땅은 몽골-타타르의 지배를 받는다.

1263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류리크 왕조 출신)가 모스크바 지역을 영지로 획득하고, 1283년 모스크바를 수도로 정하면서 ‘모스크바 공국’을 건국했다. 14세기 무렵 이반 1세는 킵차크 칸국의 ‘칸’으로부터 루스 땅의 대리통치자 직위인 ‘블라디미르 대공’을 얻어 모스크바 공국을 대공국으로 격상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380년 쿨리코보 벌판에서의 몽골-타타르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몽골-타타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1480년 이반 3세 시기 타타르의 군사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가 자진 철수하면서 점령기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렇게 자신들의 힘으로 이민족의 지배를 끝낸 경험은 내부통합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반 3세는 1505년까지 집권하면서 법전 편찬, 농노제 확립, 신분 질서 구축, 통치권 세습의 원칙 확립 등 모스크바 대공국의 골간, 즉 전제정치 체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1453년 멸망)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해 자신을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 칭했다. 또한 이반 3세는 로마 황제의 쌍두독수리를 러시아의 문장으로,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당시 로마는 종교적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동방정교를 그리스도교의 정통이라고 생각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로 공표했다.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이반 뇌제, 1530~1584)에 이르러 전제정치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공후가 아닌 최초의 러시아 ‘황제’(Caesar, 차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도 이 시점(1547년)부터다. 하지만 권력이 강해질수록 그 절대 권력에 대한 탐욕은 커졌으며 농노제는 극심해졌다. 1598년부터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겨 1613년까지 차르가 없는 ‘대동란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러시아는 1601~1603년 사이에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2백만 명이 죽는 대기근을 겪었고, 1605년~1618년 사이에는 ‘참칭자 드미트리 전쟁(폴란드-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 제1공화국에 일시적으로 점령당했다.


▲ 모스크바 공국에서 모스크바 대공국까지 영토 변화 © 이인선 통신원

민중들은 이런 일련의 사태를 목도하면서 분격했다.

민중들은 모스크바 총주교의 ‘정교 신앙과 러시아 땅을 지키자’는 격문에 호응해 폴란드를 비롯한 외세와 지배 세력인 세습대귀족에 맞서는 해방투쟁을 선포하고선 해방군을 결성했다. 하지만 해방군은 중무장하고 고도로 훈련된 폴란드 정예군에게 처참하게 격퇴당했다. 이때 스웨덴이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모스크바로 진격해오기까지 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쿠지마 미닌(볼가강의 상업 도시 니즈지의 푸줏간 주인)이 나섰으며, 상인들이 자금을 보태 국민의용군을 결성했다. 미닌이 발의하고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포자르스키 공후가 이끈 국민의용군은 1612년 10월, 마침내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모스크바를 되찾았다. 러시아는 이때를 기려 11월 4일(당시 10월 22일)을 ‘국민 단합의 날’로 지정했다. 이는 외세에 대한 민중 투쟁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 미닌과 포자르스키 공후 © 이인선 통신원

민중 투쟁의 싹 : 18세기 러시아 제국 들여다보기

이듬해인 1613년, 이반 4세가 세습대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신분제 의회인 ‘전국회의’는 당시 유력한 대귀족이자 모스크바 총대주교였던 표도르 로마노프의 아들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이로써 862년 류리크의 루스 땅 진출로 시작해 700년이 넘어 계승되어 온 류리크 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 로마노프 왕조는 이후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 1682~1725) 집권 시기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국호를 ‘러시아 제국’으로 제정하며 절대주의 황정의 시대로 나아갔다. 이렇게 1917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때까지 300년간의 로마노프 왕조 시대가 열렸다.

농민봉기는 18세기 러시아 제국으로 자리 잡기 전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농민 봉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지위를 살필 필요가 있다. 농민들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소득은 매우 적었으며 사회경제적 지위는 열악했다. 농노제하에 농민들은 거의 모두가 국가에 봉사하는 관리들과 군인들 및 지방귀족들의 땅을 경작해 주며 그 대가를 받았다. 그런데 귀족들은 자신들이 국가에 의무적으로 바쳐야 할 돈을 농민들을 착취해 마련했다. 그래서 농민의 삶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농민들은 귀족들을 위해 부역을 했고, 교회가 요구하는 헌금과 부역에도 응해야만 했다. 중부 러시아의 경우, 친위대 ‘오프리츠니키’의 행패로 말미암아 농촌은 황폐해졌고 이것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가혹한 주인을 떠나 상대적으로 자비로운 주인을 찾고자 했고 또는 누구에게도 속박받지 않는 곳으로 가고자 했다.


▲ 러시아 농노제를 묘사한 그림 © 이인선 통신원

하층 농민들과 도망친 농노, 카자크(슬라브계 군사집단) 등이 규합해 볼로트니코프 농민 봉기(1606~1607년), 스텐카 라진의 농민 봉기(1667~1671년)를 일으켜 중앙 정부에 저항했다. 농민들의 봉기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나라의 곳곳에서 농민, 노예, 도시 상공인들의 개별적인 봉기가 일어났지만, 가혹한 탄압의 철퇴와 거짓된 약속 아래 차츰 줄어들었다. 특히 1649년 법령을 통해 농노제가 완성되고(농노법) 도망 농민의 단속이 강화되고 농민의 이동은 전혀 인정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반 볼로트니코프가 이끈 농민 봉기는 봉건 영주들을 몹시 놀라게 했고, 농노제 강화를 여러 해 동안 지연시켰다. 블로트니코프 봉기는 라진의 농민 봉기, 그리고 이후 푸가초프의 대농민 봉기(1773~1775년)를 위한 토양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 내부에서 민중 혁명은 시작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은 라진을 농민 구제의 영웅으로 노래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18세기 러시아는 표트르 1세, 예카테리나 2세를 거치며 귀족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지지를 얻기 위해 농노제 강화를 추진했다. 이 때문에 1762년부터 1769년 사이에만 러시아에선 50회 이상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예카테리나 2세 때에는 토지와 농노를 각기 다른 재산으로 취급하는 법안을 제정해, 민중들이 ‘모든 지주를 죽여버리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일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푸가초프의 대농민 봉기는 농노해방, 인두세 폐지 등을 외치며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해 관리와 지주들을 죽였다. 그러나 정부에 매수된 부하들에 의해 라진이 체포되어 1775년 1월 붉은 광장에서 능지처참당하면서 민중 투쟁의 불길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때 지식인들(인텔리겐치아)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러시아 사회의 문제점을 꿰뚫어 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 투쟁의 봉오리 : 19세기 러시아 제국 들여다보기


▲ 러시아의 영토 확장 © 이인선 통신원

러시아의 민족의식은 1812년 조국전쟁(위대한 애국 전쟁)이라고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고양되었다. 20~30대의 젊은 귀족들로 이뤄진 정예 부대 장교들은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 갔다. 이렇게 프랑스 파리에 입성한 장교 출신 지식인들에 의해 유럽의 문물과 프랑스 혁명으로 야기된 자유의 물결이 러시아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나폴레옹의 독재와 독선에 대항해 목숨 바쳐 싸웠고,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이뤘다는 자부심을 안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조국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라 불리는 황제의 압제와 전근대적 제도 아래서 시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국민 6,000만 명 중에 5,000만 명이 농노인 나라, 토지 생산성이 영국의 절반 이하이면서도 농노의 노동력 수탈로 생산한 곡물을 영국에 수출해 귀족 대지주만 떵떵거리는 나라였다. 지식인들은 이제 절대 왕정을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를 수립하고 농노를 해방, 토지 개혁을 이루는 근대화된 러시아를 만들고자 했다. 이들은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1세가 자신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였고 그간 차르가 보여준 개혁의 의지로 보아 낙관적 답변을 기대할 만했기에 직접적으로 개혁을 건의했다. 하지만 차르의 개혁 시도는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극심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세상을 떠난 뒤 12월 26일(당시 12월 14일), 그날은 군대가 새로운 차르 니콜라스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한 날이었다. 청년 장교들은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를 선봉에 세웠다. 청년 장교들은 이날 왕정을 폐지하고 다섯 명의 지도자를 앞세운 민주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농노 해방은 물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러시아를 지향하고 있었다. 거사 당일의 구호 중 하나는 “콘스치투치야(конституция)!”였다. 러시아어로 ‘헌법’이라는 뜻으로 모두를 위한 헌법 제정을 하고자 했다. 이들이 만들고자 한 헌법 초안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역사는 인민들에게 속한 것이지 차르의 것이 아니다. 러시아 국민은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으며 한 개인이나 가족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최고 권력은 인민들에게서 나온다. 법을 제정할 유일한 권력은 인민들에게 속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혁명군을 지휘할 예정이었던 트루베치코이 공작이 나타나지 않았고 부사령관도 나타나지 않아 광장에 모여 구호를 외치는 것에 그쳐 거사는 실패했다. 결국 12월 봉기, 일명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기서 좀 더 이야기하자면 이때 살아남은 데카브리스트는 시베리아로 유배되었고 농사법 연구를 통한 새로운 농사 기술 보급, 학교 건립, 지역신문 창간, 도서관 건립 등 민중들과 지역 사회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855년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르 2세가 제위에 올랐다. 니콜라이 1세의 군대식 통치와 1853년부터 이어져 온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형성된 비판적 여론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여러 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이 때문에 농노 해방을 비롯한 그의 개혁은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러시아 역사의 변환점이 되었다.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봉건제 폐지, 젬스트보(지방의회) 설립, 재정 개혁으로 경제 회생, 사법·교육·군제 개혁, 본격적인 산업화 착수 등이었다. 그리고 1861년 ‘농노해방령’을 통해 300여 년간 민중들을 억압하던 농노제를 폐지했다. 이에 4,000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물론 농노해방령이 완벽한 개혁이었다고 보기엔 어렵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주들은 상실한 토지에 대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토지를 분양받은 농민들은 4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토지대금을 상환해야만 했다. 또한 개인이 아닌 농민공동체 단위로 분양되어 공동체에 속한 농민들에게 재분할되었기 때문에 해방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아주 적었다. 이는 농민들에게 납세의무와 토지상환금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즉 농민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임시 의무 농민’이라는 이름으로 정부 아래 착취적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 농노 해방령 © 이인선 통신원

결국 농노해방령도 민중을 해방시키지 못했다. 이에 민중들이 떨치고 나서 사회변혁을 일으키자는 움직임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식인들 안에 퍼진 ‘인민주의’였다. ‘인민주의’는 게르첸이 창설한 러시아 농민사회주의 이론을 근거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성을 부정하고 농민 혁명을 통해 농민공동체(미르)와 협동조합의 기초 위에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한 운동이었다. 1860~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민주의자들은 브나로드 운동부터 지하조직에 의한 테러를 통해 대중 계몽과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했다. (브나로드 운동: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이 노동자·행상인·간호사 등이 돼, 사회주의 선전과 혁명을 조직하기 위해 농촌과 공장으로 진출하는 대중계몽운동)

하지만 인민주의자들은 실패하고 만다.

1881년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의 폭탄테러로 알렉산드로 2세가 암살당했다. 당시 민중들은 차르를 아버지처럼 여겼다. 그런데 차르 암살 소식이 알려지자 민중들은 인민주의와 브나로드 운동에 대해 의구심과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결국 민심을 얻지 못해 인민주의 활동은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후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3세는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했다. 그는 여성의 교육 기회 제한, 문학작품 유통 제한, 진보적 잡지 ‘동시대인’ 등을 폐간하고, 전제주의와 국수주의 부활시켰으며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정책 실시했다. 이는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산업화의 구성원이었던 노동자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한 차르 정부는 1891~1892년의 기근과 콜레라 유행에도 무관심해 농민들 역시 불만이 커졌다. 이때 농민 잠재력을 강조하면서 이전 인민주의자들과 달리 농민 공동체는 물론 공업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 것을 주창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마르크스주의)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대를 거듭하며 봉건적 사회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점점 거세졌다. 수많은 민중의 투쟁들이 있었기에 1900년대에 이르러 러시아 혁명의 불길이 더 크고 뜨겁게 꽃피울 수 있었다.

다음 편은 이번 편에 이어 19세기 민중의 삶, 사회상이 담긴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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