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읽기] 4. 치솟는 혁명의 불길과 소련의 탄생

[러시아 읽기] 4. 치솟는 혁명의 불길과 소련의 탄생

러시아 벌판, 광활한 대륙, 우리는 러시아를 부를 때 ‘대륙’이나 ‘벌판’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는다. 러시아의 총면적은 1,707만 5,400km², 남북의 길이가 2,500~4,000km이고 동서가 9,000km에 달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눈 빈대떡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 조각이 러시아가 차지하는 몫이다. 그래서 러시아 땅으로만 지구를 거의 한 바퀴를 돌고 러시아를 횡단하면 열 한 개의 시간대를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라고 하면 또 어떠한 것들이 생각날까?

모스크바, 마트료쉬카, 소련, 톨스토이, 볼쇼이 발레, 시베리아 벌판 등 갖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린 아직 러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 러시아에 대해 얘기를 하면 소련을 기억하시는 분들로부터 “러시아? 거기 소련 아니야? 빨갱이 나라.”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2000년대 들어와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시베리아 가스를 끌어오는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러시아가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이 사실이다. 이에 러시아라는 숲을 다 보여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러시아를 정확히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 9회에 걸쳐 [러시아 읽기]를 연재한다.

4. 치솟는 혁명의 불길과 소련의 탄생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는 시대를 거듭하며 봉건적 사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점점 더 거세졌다. 수많은 민중 투쟁이 이어졌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러시아 최초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이 탄생하면서 러시아 혁명의 불길은 사회를 변혁할 준비가 되었다.

◆ 민중의 아버지가 아닌 러시아 제국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르 3세 시대의 민중 억압 정책, 반동 정치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니콜라이 2세는 언론 통제와 검열을 계속하였으며, 지방 젬스트보(의회)의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또한 1891~92년 대기근으로 국민 50만여 명이 사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니콜라이 2세는 “우리는 배불리 먹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수출을 강행할 것”이라며 곡물 수출 금지 결정을 사실상 폐기했다. 제정 러시아의 지방 자치 의회로 지역 내 교육, 의료, 통신 및 긴급 사태 시 구조업무를 담당했던 젬스트보가 “젬스트보에 공무집행 권한을 부여해 줄 의회를 소집해 달라!”라고 요청했을 때도 니콜라이 2세는 “분별없는 몽상들”, “전제정치의 원리에 대한 확고한 충성을 원”한다며 거절했다. 다시 말해 차르 정부는 국민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 안중에 없었다.

농민들은 농노해방으로 인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도시로 유입되어 노동자층을 형성했다. 당시 러시아는 대규모의 외채를 통해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산업화의 상징이 1903년에 완공된 시베리아횡단철도였다. 러시아의 공업화는 매우 빠른 기간에 이루어졌고, 1913년에 이르러 세계 5위의 공업 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하루 노동시간을 11시간으로 규정하는 법률이 1897년이 되어서야 만들어졌다. 거기에 공장 대부분이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고용하면서 노동자들은 좁은 공간에 밀집되어 장시간을 일했다. 노동자들은 비슷한 억울함, 분노, 부당함 등을 함께 느꼈다. 이에 노동자뿐만 아니라 당시 대다수의 국민이었던 농민은 농촌학교, 농촌조합, 협동조합, 직공조합 등을 조직하며 함께 사회의 현실을 직시해나갔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제점을 한순간에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은 전쟁이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건설 이후 만주와 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이익은 많이 증가했다. 그런데 이것이 같은 지역에 야심을 키우고 있던 일본과의 필연적인 충돌을 불러왔다. 1904년 1월,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발트 함대의 궤멸과 함께 러시아의 참패로 끝났다. 러일전쟁은 러시아 전제정치의 모순과 무력함을 단번에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파업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농민봉기와 학생운동도 빈번했다. 러일전쟁에서 패전은 이러한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노조들이 조직되었고 파업은 더욱 격화되었다. 1905년 1월 22일, 페테르부르크에서 파업하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집결했다. 그들을 이끄는 자는 게오르그 가폰 신부였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가폰 신부는 경찰 노조의 일원으로, 노동운동이 지나치게 급진화되지 않도록 막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을 이끌고 차르에 대한 다소 온건한 청원 형식으로 시위를 지도했다. 노동자들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겨울 궁전(Зимний дворец,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궁전, 차르가 겨울을 나기 위해 1754~62년 지어졌다)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라는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맞이한 것은 ‘아버지 차르’가 아니라 겨울 궁전 앞에 정렬한 황제의 수비대였다.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찬송을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렬한 수비대는 총을 겨누고 발사했다. 경고 사격이었다. 시위대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수비대는 시위대를 향해 곧장 총구를 겨누고 일제사격을 가했다. 겨울 궁전 앞은 곧 피바다로 변했다. 이것이 유명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130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민중에게 차르의 환상을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피의 일요일 © 이인선 통신원

◆ 수많은 민중을 죽인 암울한 시간들

학살에 대한 분노는 전국적인 시위를 촉진했다. 농민봉기도 이어졌다. 1905년 6월에는 구체제의 보루였던 차르의 군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흑해 함대의 전함 포템킨 호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0월에는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총파업을 전개했다. 전국 각지에서 파업에 참여한 인원이 200만에 달했고 국가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많은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자치 조직인 노동자 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러시아어로 ‘평의회, 대표자회의’를 의미하는 소비에트는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민주적 자치기구였다. 다시 말해 이때 병사들까지 소비에트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니콜라이 2세는 군사독재를 시행할지 입헌군주제를 시행할지 고민한다. 믿을만한 병력이 아직 만주의 전선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군사독재는 불가능했다. 차르는 자기 나름의 양보로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10월 선언에는 입법권이 있는 의회(국가 두마), 시민적 자유 부여(출판,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선거권 및 노동조합 결성권 부여, 농민상환금 폐지 등이 담겼다. 하지만 이는 반발을 줄이기 위한 잠정적·형식적인 약속일뿐이었다. 민중을 대변하는 국가 두마 선출에 여성·병사·25세 미만 청년·중소기업 노동자 및 소수 민족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차르 정부는 갖가지 구실을 잡아 두마를 해산시키며 끝내 정부의 뜻에 맞는 두마를 구성했다. 두마를 손아귀에 넣으면서 정부는 다시 러시아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전력을 국내 정치에 쏟아도 부족할 때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니콜라이 2세도 국내 정치의 어려움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쟁의 참가로 흔들리는 민심을 바로잡고 차르를 중심으로 국민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이에 일시적으로 애국주의의 물결이 러시아를 뒤덮었다. 지원병들이 쇄도했고 많은 이들이 차르와 전제정치에 대해 가졌던 반감을 조금이나마 잊었다. 하지만 문제는 러시아가 전쟁에, 특히 새로운 현대전에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무분별한 징집으로 국민의 대다수인 농민들이 전장에 나가며 생산량이 떨어져 도시의 식량난과 원료난이 가중되었다. 전쟁의 장기화와 연이은 패배로 사기 역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전세가 여의치 않자, 니콜라이 2세는 직접 전쟁을 총지휘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전선 부근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고 국내 정치만 더욱 악화시켰다. 이제 정부는 황후 알렉산드라와 황후의 신임을 얻은 괴상한 성직자인 라스푸틴의 지배 아래 있었다. 각료들조차도 라스푸틴의 뜻에 따라 임명되었다. 연속되는 패배와 수도의 이러한 현실은 불만을 초래했다.

◆ 전 민중이 함께 사회를 변화시켰다

1916~17년의 겨울, 러시아의 모든 공업과 산업은 전쟁 수행에 맞춰져 있었다. 자연히 모든 생산품이 전선으로 배당되었고, 그 결과 수도 페트로그라드(독일식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는 전쟁 시작 후 폐지되었다)에서 생필품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2월 23일 방직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네바강을 건너 시내 중심부로 진입하려고 시도했고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다. 오후 5시가 넘어서 시위대는 네바강의 저지선을 돌파해 시 중심부의 넵스키 대로를 행진했다. 이날은 국제 여성의 날(현재 3월 8일)이었다. 공장 노동자들도 합류하여 시위대의 인원은 13만 명이 넘었다. 다음날인 2월 24일에는 수도의 다른 구역으로까지 시위가 번져나가고 참여 인원은 21만에 달했다. 거기다가 학생들까지 시위 대열에 대거 참가하기 시작했다. 2월 25일 마침내 시위는 페트로그라드 전역으로 퍼졌다. 이제 3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시위에 가담했다. 구호는 ‘빵을 달라’ 하나에서 ‘전쟁 즉각 중지’, ‘전제정치 물러가라’, ‘노동자 소비에트 만세’ 등으로 추가되어 나아갔다.

하바로프 페트로그라드 군사령관은 니콜라이 2세로부터 “내일이 되기 전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무질서를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멈추게 하라”라는 전문을 받았다. 26일 도시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곳곳에 참호가 들어서고 무장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전날 시위가 집중되었던 넵스키 대로에는 기관총이 들어섰다. 오후에 시위가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이 넵스키 대로를 향해 걸어왔다. 이 순간 수비대의 총이 불을 뿜었다. 시민들이 거리에 쓰러지고 시위대가 흩어졌다. 이날 1,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민들 못지않게 병사들도 이날의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 특히 막사로 돌아온 볼린스키 연대의 병사들은 동포에게 총을 쏜 것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급기야 병사들과 하사관들은 자체적으로 더 이상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생각은 곧 수많은 부대에 퍼져나갔다. 27일의 아침, 평소처럼 부대를 사열하러 온 장교에게 볼린스키 연대의 병사들은 “건강하십시오”라는 평소의 구호 대신 일제히 “우라(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놀란 장교에게 병사들이 외쳤다. “우리는 더이상 시민에게 총을 쏘지 않겠소!” 이어서 다른 부대들도 합류하면서 이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로마노프 왕가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권력을 양위 받은 차르의 동생 미하일 대공이 제위 계승을 거부하면서 300년을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당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주도층이 멘셰비키였기 때문에 2월 혁명을 멘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른다.


▲ 2월 혁명 © 이인선 통신원

◆ 임시정부와 케렌스키의 반민중적 행보

두마 임시 위원회와 소비에트의 합의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자유주의 계열인 입헌민주당과 10월당이 중심이 된 부르주아 정부였다. 임시정부는 제헌의회가 수립되기 전까지 활동하는 과도적 기관이었다. 여기에 당시 멘셰비키가 주도층이었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부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대표로 참여했다. 케렌스키는 임시정부 구성 당시 신분제 폐지, 종교와 인종차별 철폐, 인민의 자유선언, 교회와 국가의 분리선언 등을 약속했지만 이를 제헌의회 소집 후로 연기하고 1차 세계대전을 지속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통신, 우편, 발전 등 국가의 전반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케렌스키가 멘셰비키로 법무부장관, 육군장관, 해군장관을 지내고 총리 겸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역임하며 영향력을 넓혔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어떠한 실질적 권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임시정부의 지시나 명령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에 의해 허용되는 정도로만 수행되었다. 결국, 소비에트가 실질적인 권력의 모든 본질적인 요소들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군대와 철도, 우체국, 그리고 전신 등이 모두 그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임시정부는 소비에트가 인정하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알렉산드르 구치코프, 기업가 출신 두마 의장)


▲ 러시아 인구 수 대비 농민 수 © 이인선 통신원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는 1903년 제2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분열되었다. 멘셰비키는 정통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본래의 이념이 무색하게 국회 진입 후 입헌민주당과 제휴하며 당내 온갖 개량주의를 끌어들였고 개인주의적 소부르주아주의를 용인했다. 1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일부만 전쟁에 지지하다가 2월 혁명 이후 대부분이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멘셰비키는 혁명지도자는 진보적 부르주아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동맹자로, 농민은 봉건의 잔재인 반동세력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볼셰비키는 혁명 주도층을 프롤레타리아트로, 농민을 동맹 세력으로 보며 러시아 부르주아는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했다.

농노해방 이후 많은 이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해 노동자가 되었지만 1914년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은 전체 인구의 18% 정도였다. 그리고 1917년엔 러시아 공장과 광산, 건설공사장 노동자들은 다 합쳐도 약 350만 명(전체 인구 9,100만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대다수 민중이 농민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민중은 농민을, 국민의 대다수를 반동 세력으로 간주하는 멘셰비키보단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것이 농민의 염원을 해소해주리라 생각했다.

◆ 전쟁 중지,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

임시정부와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간의 불안한 이중권력을 지속하는 가운데, 역사의 흐름을 뒤엎을 사건이 발생했다. 4월 3일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독일의 도움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했다. 레닌은 이미 부르주아 혁명이 1차 세계대전으로 끝났고 2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임시정부 대신 소비에트(여기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주도로 이루어짐)가 국가를 주도해야 한다며 제국주의 전쟁을 그만두고 민중을 억압하는 내부의 적을 향해 총구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제를 발표한 후 레닌은 자신의 주장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전쟁 중지, 임시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

러시아 전역에서 전쟁 중지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도도 급격히 상승했다. 실제로 3월 2만 5천~4만 명이었던 지지자가 10월 26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케렌스키는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에 항의하며 7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소비에트 지도부에 가서 혁명을 지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닌은 아직 볼셰비키의 힘이 확실치 못한 상황에서 권력을 얻을 수 있어도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군중들에게 애매한 답변만 주었다. 결국 볼셰비키 지도부가 이끌지 않는 상황에서 봉기군은 방향을 상실하고 갑작스러운 사격에 수포가 되었다. 이후 케렌스키는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부를 독일 스파이로 몰아 체포를 명령하면서 레닌은 다시 러시아 땅을 떠난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을, 사회주의 러시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수도의 안정을 위해 군대를 수도로 진주할 것을 결정하고 새로운 사령관으로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을 임명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케렌스키는 그를 해임하고 자신이 총사령관직에 취임했다. 이에 코르닐로프는 ‘무정부 상태의 러시아를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곧장 진격했다. 케렌스키를 비롯한 멘셰비키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수도를 방어할 힘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코르닐로프는 트로츠키를 비롯해 체포되었던 볼셰비키들을 대부분 석방하고 이들을 통해 수도의 노동자들을 무장시켰다. 이후 9~10월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멘셰비키 세력을 몰아내고 볼셰비키의 힘을 공고히 했다.

1917년 10월 24일 이른 아침, 임시정부가 선제공격을 가했다. 케렌스키의 명령으로 임시정부에 충성하는 사관생도들이 볼셰비키의 신문 인쇄소를 공격한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인 레프 트로츠키는 즉시 반격을 가했다. 같은 날 오후, 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으로 혁명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의 행동은 매우 신속했다. 하룻밤 사이에 겨울 궁전을 제외한 주요 건물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모두 볼셰비키의 수중에 떨어졌다.

10월 25일 제2차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대회가 개최되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대회 하루 전부터 볼셰비키의 혁명을 볼셰비키의 독단적인 혁명이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이 혁명을 ‘소비에트의 등 뒤에서 저질러진 군사적 음모’라고 불렀다. 이들의 항의의 뜻으로 회의장을 떠났다.

26일 새벽 4시, 레닌은 의기양양하게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알렸다. 임시정부는 완전한 종말을 맞았고, 19세기 말부터 많은 혁명가가 꿈꾸어 온 사회주의 국가가 실현되었다. 특히 ‘노동 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1918)으로 러시아 혁명의 목적과 사회주의적 권리구상을 담았다. 혁명 전까지 봇물 터지듯 나온 민중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주요 내용으로 토지의 사적 소유 폐지와 생산운송수단의 국유화, 모든 은행의 국유화 및 보편적 노동 의무 등이 담겼다. 그리고 여성 평등권, 여성 투표권 부여, 대외채무불이행선언, 무상교육 및 무상진료 체계 도입 등 역시 민중을 중심으로 한 당시 주도층이었던 볼셰비키의 정책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백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멘셰비키)을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이 지원하면서 내전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917년 혁명이 발발하자 연합국이었던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에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시작했다. 10월 혁명 이후 1918년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독일 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해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종결했다. 연합국의 다국적 해외 원정군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돕고 러시아의 항구에 무기와 탄약을 보급하는 것을 확충하고 동부 전선을 다시 여는 것을 목표로 하며 반볼셰비키 군대인 백군을 지원했다.

1922년 10월 적군이 백군에게 승리를 거머쥐며 적백내전은 끝나게 되었다. 백군이 실패한 원인은 크게 분열, 소수민족 탄압, 외국에 의존, 반민중적 대안 등 때문이었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했다.


▲ 소련의 국기 ©이인선 통신원

소련의 국기는 다음과 같다. 바탕의 색은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했고 그 위의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 즉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말을 의미했다.

소련의 국장 역시 국기와 비슷하다.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며 빨간색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이 빨간색 리본에는 소련의 표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연방을 구성한 공화국의 언어로 쓰였다.


▲ 소련의 국장 © 이인선 통신원

다음 편은 스탈린에 관한 이야기이다.

*러시아는 1918년에 현재 우리들이 날짜를 계산하는 방법인 그레고리력을 도입했다. 러시아 동방정교의 율리우스력은 그레고리력보다 13일이 느리다. 예를 들어 10월 혁명의 경우 현재 날짜로는 11월에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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