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주의란 우리들 자신속에 큰 것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 비굴해지며 굴종하는 자세
‘사대주의’는 영어로 플렁키즘(flunkeyism) 혹은 토디즘(toadyism)이다. 이런 말들은 모두 노예, 굴종, 비굴, 아첨, 종의 옷차림으로 시중드는 등을 의미한다. 얼간이, 멍청이, 바보, 머저리란 뜻으로도 사용된다. 우리가 ‘월드컵 4강 신화’ 운운할지 몰라도 지금 남은 우리를 그렇게만 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의 조선 침략 제일 명분은 조선이 천년 이상 중국에 사대를 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런 논리를 전 세계에 유포시켜 놓았다. 이 논리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한 두 나라는 바로 일본과 미국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들 두 나라가 사대주의 논리로 우리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이 단지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한 문장도 시정되지 않은 그같은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정부 그리고 우리들 자신마저 이를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한말 초대 조선 주재 미국 전권 공사 푸트(Lucius H. Foot)는 “한국은 침체하고 오랜 동안 중국과 일본에 의존해 살았기 때문에 한국인은 무기력하고 자치 능력이 없다”라고 했다. 주일본 미국 공사 스티븐슨도 똑 같은 소리를 하다 1907년 샌프란시스코 베이 다리 나루터에서 장지연 전명운 두 열사의 저격을 받고 사살 당하였다. 심지어는 한국에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마저도 1904년 조선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일본은 이런 자주권이 없는 두 나라를 조선과 필리핀으로 설정하고 1904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그리고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다는 약속을 저희들끼리 주고받은 것이다.
사대주의 원죄는 신라 지도층
그렇다. ‘사대주의’는 일본이 확대 재생산한 것이기 때문에 사대주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식민사관의 일부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사대주의를 일본이 확대 재생산하고 악용했다고 해서 그 빌미를 제공한 사실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원인 제공자가 다름 아닌 신라 지도층이었다고 보며 신라의 잘못된 통일은 사대주의의 뿌리가 되어 그 원죄를 고스란히 우리가 지금 짊어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일본과 미국은 21세기 대낮인 지금도 버젓이 100년 전 논리를 늘어놓고 있다.
노무현전대통령이 부시를 만난 자리에서 부시는 아무런 서슴없이 '작전권 환수 문제를 정치 쟁점화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 국민들과 지도층은 이 말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한번 주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정립해 보자. “부시 당신이 무엇인데 우리를 향해 콩 나오라 팥 나오라 하느냐”고 항의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부시의 이런 내정 간섭적인 발언을 아주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는 상태가 바로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사대주의이며 그 연원은 신라 지도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국내 유학자들은 사대주의를 미화하고 국사학자들은 사대주의를 합리화하는데 급급하다. 유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 숭상한 것이라며 미화하고, 국사학자들은 신라의 사대주의 외교가 아니었다면 우리 민족은 오래 전에 몽고족이나 만주족 같이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해 없어졌는데도 청을 멸시하고 송장의 시체를 부등켜 안으며 명을 그리워했다. 모두들 명의 위대한 유교 문화인 주자가 만들어 놓은 사상 체계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자가례(주자가 유가의 예법의장에 관해 상술한 책)를 맹목적으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회 전반은 경색되고, 반상 차별은 물론 여성 차별도 야기했다. 한편 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통일을 했더라면 하는 가설은 아예 설정조차 안하고 신라 통일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 점만으로도 이들은 경주 중심의 김부식 사관의 추종자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대주의는 본심을 숨기고 자신들의 의도를 미화하고 합리화함으로써 그 정체를 쉽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사대주의는 기득권층에게 자기 안전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승만과 주변 친일파들, 고종과 주변 중신들, 신라 경주 중심의 기득권층들, 현재 여당 안에 포진한 이승만 자유당 때부터 대물림한 기득권층 등이 바로 사대주의의 담지자들이다. 이들은 개인 출세욕이 국가나 민족의 이익보다 앞서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무엇이든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사대주의이다. 그러나 사대주의자들의 이익은 민중의 이익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민중들은 언제나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오며 이 나라의 역사를 지켜왔다. 동학 농민 전쟁의 주인공인 농민들이, 지금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의식 있는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그럼 지금부터 김유신의 사대주의 배경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하여 우리 주변에 김유신과 같은 인간들이 있는지도 살펴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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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사표란 병력동원을 구걸하는 상주문을 말한다. 신라 지도층이 걸사표를 당에 보낸 612년(진평왕 34년)은 사대주의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걸사표를 작성한 주체는 김유신과 김춘추다. 김유신의 출신 배경을 알면 그가 얼마나 출세를 갈망했는지, 왜 그렇게 망국적 굴욕 외교를 하면서까지 사대주의 행각을 벌렸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중앙으로 진출할 수 없는 주변부(가야출신에 충북 진천 태생) 인물로 태어난 김유신이 경주 중앙 무대로 진출하려는 욕망은 너무나도 철저한 것이었다. 김유신은 한 건을 하지 않고서는 자기 신분으로 경주 지도층인 진골의 숲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계책을 세워 김춘추와 처남매부 간의 관계를 강고하게 맺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누구 보다 앞장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려 혈안이 되었다. 이는 그의 조부 때부터 내려온 '가문의 부흥' 전략과 맥을 같이 한다. 드디어 김유신은 그의 할머니 만호 태후로부터 “너는 진실로 내 손자”라는 격찬을 받는다. 서현과 만명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만호 태후도 김유신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마음을 돌린 것이다. 김유신은 이런 칭찬을 들을수록 더욱 분발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김유신 같은 인간의 유전자는 진평왕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역사 속에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대주의는 이렇게 인간의 출세욕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그 혈맥은 굳건히 우리 역사의 역사관이 되고 역사 철학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대주의 하는 것은 당연하고 조공외교가 왜 잘못된 것이냐며 뻔뻔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세욕과 개인의 기득권 쟁취를 위한 야망과 야심이 사대주의의 배경을 이룬다.
반북친일단체들이 대한민국 국부로 추앙받는 리승만의 반민족성과 출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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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유신과 같은 사대주의 피를 리(이)승만에게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여운형의 좌우합작 나라를 한 치도 사랑하지 않으며 반쪽짜리라도 대통령이 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민족이 둘로 갈라지건 말건 정권을 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친일 매국노들을 자기 기반으로 삼았다. 결국 그 때 형성된 매국노들은 남한 사회에서 기득권층이 되어 보수의 이름으로 행세를 하고 있다.
리(이)승만은 김유신과 같이 동족을 토벌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한국은 침체하고 오랜 동안 중국과 일본에 의존해 살았기 때문에 한국인은 무기력하고 자치 능력이 없다”라고 주장과 논리를 펴던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지연과 전명운 두 열사의 법정 영어 통역을 부탁받았으나 두 열사가 테러리스트라고 통역을 거부했다. 그 당시 교민들이 돈을 모아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비행기 값까지 주며 리(이)승만을 초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하고 동부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당시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 유학가 있던 신흥우가 통역을 대신하였다.
리(이)승만은 우리 땅에 친미 사대주의를 심은 장본인이다. 그는 안중근 그리고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자기와 차별화하였다. 그는 국군 작전권을 1950년 미국에 넘겨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어찌 김유신의 사대주의 유전인자가 이승만 한 개인에게만 흘러들어 갔겠는가? 사대주의는 21세기 백주 대낮에 백악관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리며 나라의 운명을 통째로 내맡기려는 모든 정치인들의 혈맥 속에 흐르고 있다.
우리 역사를 두 번 불행하게 만든 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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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은 흑인 노예 해방에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흑인 자신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노예근성 그 자체라고 했다. 일본의 사대주의론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대주의 근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적으로 살려면 우리 자신의 내부에 주리 틀고 있는 사대주의 근성 자체와 투쟁해야 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고 악용하고 있는 외세들과 투쟁해야 한다. 일본은 을사늑약후 곧바로 우리 역사를 사대주의 사관으로 왜곡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이병도와 신석호 같은 친일파 학자들이 앞장섰다. 해방 후 지금 60대 이상의 사람들이 그 당시에 배울 수 있었던 역사책은 이병도의 『국사대관』뿐이었다. 국사대관이 일본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조선사』를 이름만 바꾸어 놓은 것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차라리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면 사람들이 속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병도는 우리를 두 번 불행하게 만들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결과물인 『조선사』를 해방되자 마자 불살라 버리고 자기의 잘못을 이실직고 했어야 하거늘 그는 자기 책으로 돈벌이를 했다. 자신은 경성 제국대학의 전신인 서울대학에 교수가 되어 둥지를 틀고는 알을 까고 새끼를 쳐 그의 사관이 지금 대한민국 국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게 했다. 학계, 언론, 정치, 문화 전반에 이병도의 사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이병도의 후예들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러지 않아도 사료가 부족하여 어려움이 있는데 자기들 구미에 맞지 않는 사료들은 모두 ‘위서’ 운운하면서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병도와 함께 편수관이었던 신석호는 1966년의 글에서 “일제 36년간 일본이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고 사료를 출판하여 미개척 상태에 있었던 한국사를 개발한 공은 적지 않다”(경향신문 1966년 1월 31일)고 했다. 이 얼마나 후안무치한 소리인가. 이병도와 이들 식민사학자들은 해방 공간에서 주류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한 치의 잘못도 뉘우치지 않았다. 더욱이 위 신석호의 말은 거짓이다. 한국사는 미개척이 아니라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같은 분들이 바른 국사학을 일제에 쫓기는 와중에서도 수립하고 연구해왔다.
친일 행위자들이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면 적어도 해방 후 자성하고 그늘에서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하며 살아갔어야 할 것이다.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음지에서라도 얼마든지 회개반성하며 역사에 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엄청난 기득권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해방 후에도 식민사관을 재확립하여 그것을 일본 식민사관 밥상에 진상했던 것이다.
‘사대 관계’와 ‘사대주의’는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대 관계’라는 말과 ‘사대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중국이 동북 공정을 추진하면서 그 명분과 논리를 고구려가 당에 조공을 했다는 것, 즉 사대를 했다는 데서 그 첫 근거를 찾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일본도 백제도 신라도 조공을 했다. 조공한 나라들이 모두 중국의 영토라면 지금 동북아 일대에서 중국 땅이 아니고 중국 역사가 아닌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사대주의의 제일 요건으로 조공(tribute)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남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반드시 작은 선물을 들고 가야 하듯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방문 예물은 상례였다. 여기에 유교의 군신관계를 적용하여 중국이 군(君)의 입장으로 처신하면서 주변 국가를 신(臣)으로 보게 되었고 자연히 여기서 ‘사대관계’가 맺어졌다. 여기서부터 중국 사서에 사대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의 경우를 제외하곤 당과 싸워 한 번도 져 본적이 없었다. 조공이라는 봉건주의 유물을 청산해야 마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낡은 유산으로 옛 중국의 제국주의를 합리화해 나간다는 것은 실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오리엔탈리즘’란 동양인 자신이 동양 자신을 멸시하고 서양을 동경하며 존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대주의란 우리들 자신 속에 큰 것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 비굴해지며 굴종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대주의와 사대 관계는 다른 것이다. 한국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한국이 중국을 사대한 것은 중국의 높은 수준의 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신라 중심의 역사를 쓴 김부식을 한껏 옹호하는 자세를 갖는다. 유학자 김부식의 기본 입장은 공자를 높이고 중국을 훼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가 아무리 앞서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자기 주체적인 의식이 확립되지 않고 이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면 이것은 정신적인 병이 되며, 이 경우를 두고 ‘사대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사대주의의 정의는 에드워드 W.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정의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인 것의 아픔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를 중국의 한사군이 설치된 때로부터 보고 이를 조선사에서 확대 부각시킨다. 역사 연구는 자연 과학 연구와 달리 연구자 자신이 주관적으로 자료 자체를 취사선택하고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 역사가 영광스럽던 시기를 고의로 삭제 축소시키고 중국의 지배를 확대하고 팽창시켰다. 기자의 도래 이후 한국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등 고조선 역사 자체를 아예 말살해 버린다. 그래서 이병도의 『역사대관』에 의하면 반만년 역사에서 2000년은 간데 온데 없다. 최근 용산에 개관한 국립 박물관은 개관 당시 고조선관의 흔적도 없었다. 그 후 시민 단체의 항의가 빗발치자 겨우 한 쪽 귀퉁이에 자리를 채워 놓았다.
반면 북한 평양의 조선 역사박물관을 가보라. 남에서는 위서라고 취급한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사관과 연대기를 그대로 수용하여 단군 48대 왕들의 이름으로부터 박물관 입구가 시작된다. 그리고 대박산 기슭에 있는 단군릉은 또 어떠한가. 규원사화의 내용을 그대로 단군릉 축조에 응용하였다. 남한에서 기독교인들이 단군 목을 자르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사대주의는 이와 같이 오랑캐 자신이 오랑캐를 멸시하는 오리엔탈리즘 속의 오리엔탈리즘이다. ‘한국적인 것의 슬픔’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고 무시 내지는 멸시하는 데 있다. 이는 병 가운데 불치의 큰 병일 수 있다. 사대주의는 감나무 접붙임을 하듯이 청일 전쟁 이후에는 중국에서 대양 세력인 일본과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 그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지 우리 속의 오랑캐 콤플렉스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우리 민족이 이 지경으로 나가는 한 세기적 불행은 면할 길이 없다. 사대주의는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학교의 모든 교육 즉 초중고등, 대학까지 교육은 궁극적으로 사대주의 청산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글 김상일교수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