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엄주현의 『북조선 보건의료체계 구축사Ⅰ』
세상만사에는 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면서도 체험하곤 한다. 남북교류 역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한 단절에 더해 코로나19로 인한 철저한 단절이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최근 북한 관련 두툼한 연구서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환자를 진료소에 앉아 기다리지 않고 가가호호 방문하거나 농민들이 일하는 포전(圃田)을 순회하는 활동을 일상화했다… 한겨울 얼음 강에 빠지면서도 멀리 떨어진 마을에 왕진을 나갔다. 수혈 역시 당연시했다. 심지어 의사가 심한 골절을 당했어도 환자를 먼저 처치한 뒤에나 자신을 돌보았다.”(463-464쪽)
“보건의료상의 예방의학적 방침은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당적 관철을 강조했다. 그러나 산하 당조직의 인식변화는 쉽지 않았다… 말로는 보건사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보건의료 담당자를 농촌경제 캠페인에 동원해 사업을 전달할 수 없게 했다. 특히 홍역, 디스토마 등 예방대책이 필요한 중요한 기간에도 다른 사업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450쪽)
![엄주현, 『북조선 보건의료체계 구축사 Ⅰ (1945~1970)』, 도서출판 선인. 2020.3.[자료사진 - 통일뉴스]](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4/201682_82583_150.jpg)
도서출판 선인. 2020.3.[자료사진 – 통일뉴스]
엄주현 (사)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사무처장이 북한학 박사 논문 「북한 보건의료체계 구축 과정 연구」(2020.7.)를 바탕으로 『북조선 보건의료체계 구축사 Ⅰ (1945~1970)』(도서출판 선인)를 내놓았다. 무려 650여 쪽에 달하는 역작으로 북의 보건의료체계의 이론과 실제를 다뤘다.
이 책은 해방직후 소련의 영향력 아래 ‘쉐마시코 모델’의 도입부터 ‘전반적 무상치료제’ 실시, 동의학(한의학) 강화, 예방의학 서비스, ‘붉은 보건 전사’ 등 북한의 독특한 ‘북조선식 주체보건의료제도’를 시계열을 따라 펼쳐 보이고 있다.
저자는 북 보건의료 분야의 25년사를 민주적 보건의료제도 구축기(1945~1953), 사회주의 보건의료제도 구축기(1954~1960), 사회주의 보건의료제도 완성기(1961~1970)로 구분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사회주의 보건의료제도 구축기(1945~1956), 사회주의 보건의료제도 완성기(1957~1960), 북조선식 주체보건의료제도 구축기(1961~1970)로 볼 수도 있다고.
이 책은 북의 노동당대회나 최고인민회의 공식 문건이나 <로동신문> 등 북측 1차 자료를 충실히 활용한 내재적 접근이 돋보인다. 북조선식 주체형의 보건의료체계 구축 과정을 그만큼 생생히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여기에 힘입은 것. 초기 소련 유학단 명단이나 부록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된 ‘보건의료 관련 의사결정 내역’ 등 자료들도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WHO 국가 보건의료체계의 구성요소 모형’을 근간으로 보편성을 추구했다. 각 시기를 △보건의료자원의 개발 △보건의료자원의 배치 △보건의료서비스의 제공 △보건의료의 재정적 지원 △보건의료 정책 및 관리라는 일정한 틀로 분석, 서술한 것은 이같은 보편성을 적용한 것.
“민간요법 체계화 사업은 1963년 말에 3천여 건의 민간요법 중 160여 건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기반으로 민간요법의 효능과 적응증을 과학적으로 연구해 환자 치료에 응용했다. 실례로 함경북도 신유선탄광병원은 외과적 수술방법으로 치료하던 특발성괴저 환자를 곤충을 약재로 한 민간약을 만들어 완치했다.(508~509쪽)
특히 <로동신문> 등에 실린 구체적인 사례는 당시 북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당시의 당대회나 최고인민회의의 방침에 따른 맥락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한때 대외적으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김봉한의 경락이론이 급부상했다 갑자기 사라진 과정 등도 흥미롭다.
“1961년 갑자기 나타난 김봉한의 경락연구 보도는 1966년 12월까지 6년간 이어졌다”며 <로동신문>에 대서특필된 사례들을 제시하고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첫 권력투쟁에서 당권을 잡은 김일성 등 빨치산파는 자신들의 정책과 방향이 정확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경락연구는 생물학과 의학 발전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은 결실이자 당 정책의 위대한 승리라고 선전될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맥락을 제시하고 “보건의료 분야에 충분한 재정적 지원이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동의학과 민간요법에 관한 관심은 미발전한 신의학의 현실을 타개할 방안 중 하나였다”는 현실을 짚고 있다.
저자는 북 보건의료체계의 특징으로 △강력한 통제체제 구축, △의사담당구역제, △신의학과 한의학의 배합 및 약초의 적극적 활용, △부족한 자원을 자력갱생과 정성의 정신력으로 대신하는 의료인 양성 등을 꼽았다. “북조선이 처한 정치, 경제 상황과 국제관계 변화 등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환경에 적합한 북조선식 사회주의 보건의료체계로 수렴한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이다.
따라서 45년 해방과 소련의 영향력, 53년 전쟁, 56년 종파투쟁, ‘방하수 어린이 치료’, 1966년 2차 당대표자회의 등의 계기들이 북한식 보건의료체계 수립 과정에서 변곡점으로 작용했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최근 유영구 전 현대사연구소 이사장이 『김정은의 경제발전전략1,2』(경인문화사)를 총 1,400여 쪽에 걸쳐 내놓은데 이어, 엄주현 (사)어린이이의약품지원본부 사무처장이 650여 쪽의 『북조선 보건의료체계 구축사Ⅰ』을 내놓았다. 박사 논문을 토대로 한 책답게 꼼꼼한 각주는 물론 부록과 참고문헌도 알차다.
2002년부터 남북교류 활동에 뛰어들어 2005년 이후 5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해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고 관계시설들을 둘러본 경험이 있는 저자가 70년대 이후를 담은 2권을 내놓는다면 북한의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기본 교재가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다이내믹한 체계 구축의 동학을 드러내고자 했던 애초 목표에 크게 못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자세를 낮추면서 70년대 이후부터 김정은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후속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저자 역시 “후속연구를 위한 경주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뱀다리로, 책 제목은 물론 본문에서도 북측을 ‘북조선’이라고 호칭한 대목이 이채롭고 낯설다. 북측의 국호를 있는 그대로 써준다면 그냥 ‘조선’이라고 하거나 남측 기준에서 익숙한 ‘북한’으로 표기하면 될 텐데, 굳이 ‘북조선’이라 부른 저자의 선택에 의문표를 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