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언급한 작품과 비슷한 연화도이다. 현실에 있는 사물을 소재로 삼았지만 보이는 것과 내용은 전혀 다르다. 철학을 시각적, 정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조형방법을 사용해 창작한 것이다.
우리그림 감상법 -비밀의 문, 조형원리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공모전에서 큰 상을 받은 우리그림이 있었다.
이를 서양화를 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삼았는데 이유인즉, 연꽃과 원앙을 함께 그렸기 때문이다.
연꽃은 여름에 피는 꽃이고 원앙은 겨울 철새이니, 연꽃 아래에 원앙이 노니는 그림은 생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타당하고 합리적인 지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그림의 조형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무식(無識)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그림은 현실의 세상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다.
연꽃, 원앙 따위는 작품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에서 가져온 소재에 불과하다.
이 작품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학적 가치를 표현한 것이다.
연꽃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군자를 상징하는데 이는 ‘수신(修身)이고, 원앙은 화목한 가정을 의미하는 제가(濟家)이다.
이 둘의 결합으로 평온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가 되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생태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혹, 이런 그림이 이상하고 허접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등에 날개가 있는 아기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샤갈의 그림이나 괴기스러운 피카소의 작품은 뭐라 할 것인가.
만약 당신에게 ‘인류애’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자연물만을 이용해 그려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아마도 난감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조형적으로 풀어내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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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그림의 철학은 유학이다.
구체적으로는 ‘성리학(性理學)’이다.
우리그림에는 유학과 성리학이 추구하고 규정하는 세상이 표현되어 있다.
성리학은 ‘사회적 인간’에 관한 철학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성숙, 발전시키고자 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사회공동체에 방해가 되는 원초적 욕망을 조절, 통제한다. 성숙한 사회적 인간은 ‘군자(君子)’로 추앙했다. 군자를 굳이 서양에 빗댄다면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그림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 세계를 그린다.
현실을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만들어낸 세상이라고 규정해도 된다.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인정하되, 수양을 통해 성숙한 사회적 존재, 즉 군자가 추구하는 세상이 곧 우리그림 속의 세상이다.
예를 들면, 산수화는 선비들이 추구했던 이상세계이다. 그곳에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어떤 요소도 없다. 그렇다고 각각의 사물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여백을 통해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시공간을 신비롭게 만든다.
산수화는 세상사의 욕심과 고통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인의예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단지, 그 세상이 멀리 있는가, 가까이 있는가는 시대적 흐름에 의해 규정된다. 시대가 어려우면 까마득한 상상의 세상이 펼쳐지고, 세상이 좋아지면 주변의 친근한 풍경이 그려진다.
우리그림의 조형원리는 현실이 아니라 이상적인 가치와 시공간을 표현하는데 맞추어져 있다.
군자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는 개인의 영생과 부귀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백성들이 주인공이다.
따라서 우리그림에는 공동체의 관점, 공동체의 조형원리가 투영되어 있다.
이는 서양의 개인, 영웅주의와 확연히 구분된다.
그림 속에 구현되는 시공간과 사물은 공동체의 성원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표현된다.
원근투시법이나 명암법은 사물을 심하게 왜곡시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1인칭원근투시법이 아니라 보다 확장된 공동체의 원근투시법을 사용한다.
정면 시점, 아래에서 위로 보는 시점, 위에서 아래로 보는 시점처럼 하나의 그림에 여러 개의 시점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다.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라는 작품이다. 실제 풍경을 참조했지만 많은 차이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마음 속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이를 진짜 세상, 진경이라고 했다.
좀 더 쉽게는 화면의 위쪽은 멀고 높으며, 화면의 아래쪽은 가깝고 낮다. 사물이 겹치는 부분은 안개나 여백을 넣어 원근을 만든다. 멀리 있는 사물이라도 흐리거나 작게 그리지 않는다.
이를 ‘삼원법’, ‘확대원근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명암은 사물의 입체감을 만드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동시에 시간성을 규정하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우리그림에서는 현실적 명암이 아니라 상징명암법을 사용한다.
사물의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둡게 표현하며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다.
그림자를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현실적인 사물을 표현할 때에도 위와 같은 조형원리를 사용한다.
무엇보다 각 사물에는 사회적 가치에 따른 상징을 붙인다. 반대로 상징이 붙어 있지 않는 사물은 그리지 않는다.
이는 사물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것이다.
원근투시법과 명암법을 사용한 [책가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1인칭원근투시법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 공동체의 시점인 것이다. 또한 사물에는 약한 명암이 들어가 있지만 그림자가 없다. 이를 통해 사물의 왜곡을 막고 고정된 시간을 풀어 확장시켰다. 물론 감상하는 사람은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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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들은 이론을 몰라도 그림이나 형상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의존하는 것이 시각이다.
심지어는 ‘맛도 보고, 소리도 보인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인지 보면 다 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시각은 가장 오류가 많은 감각이기도 하다.
눈에 보인다고 모두 진짜는 아니다. 허상에 속아서 패가망신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사물, 혹은 숱한 시각적 영상은 모두 본질을 숨기고 있다.
또한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기도 한다.
아무튼 서양화든 우리그림이든 대충 눈에 보이는 데로 그리지 않는다.
철저하게 철학과 미학에 맞는 조형원리를 사용해서 창작한다.
반대로 조형원리를 알면 미학과 철학을 검증할 수 있다.
나는 철학가나 미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미술의 조형원리를 통해 유학과 성리학, 혹은 서양의 인본주의를 이해했다.
세상의 숱한 사건이나 현상도 이런 방식으로 보고 분석하며 이해한다.
글 사진 심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