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현의 북 읽기] 당창건 75주년 열병식이 던진 메시지

북은 지난 10월 10일 0시부터 2시간여 동안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과 경축행사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했다. 특히 이번 행사는 예년과 달리 열병식과 축하쇼, 횃불시위 등이 결합된 ‘심야축제’ 형식으로 펼쳐졌다.

지난 7월 10일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의 ‘미국 독립기념일 DVD’ 언급, “특색 있게 준비하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8월 정치국 회의 발언 등을 통해 다소 이색적인 형태를 띨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지만 새벽 행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미국 독립기념일의 야간 행사, 평창 동계올림픽 등 주요 국가의 정치·스포츠 축제를 참고하고, 김정은체제 출범이후 진행된 각종 대형행사에서 시험된 기술력을 결합시켜 다양한 볼거리를 연출한 셈이다.

야간에 폭죽과 불꽃, 조명을 총동원해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켜 내부적으로는 올해 코로나19와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은 주민들을 위한 ‘축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두 달 이상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김여정 제1부부장이 ‘총괄 감독’ 역할을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보다 군사분야 성과 자축

그러나 이러한 축제 분위기와 달리 열병식에서 공개한 북의 전략적, 전술적 무기 자산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설내용은 복합적이고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선 북은 예상대로 이번 행사에서 경제적 성과보다 군사분야의 성과를 내세웠다. 김 위원장은 ‘장기적 제재’ ‘비방방역’ ‘혹심한 자연피해’ 등으로 인해 경제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어려움 극복의 공을 ‘인민’에게 돌리며 “고맙습니다”란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최신무기들로 장비한 혁명무력”으로 억제력을 확보한 만큼 이제 경제건설에 매진해 나가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인민이 더는 고생을 모르고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것”이라며 “사회주의건설의 더 높은 목표를 점령해나가는 길에서 누구나 체감할수 있는 혁신과 발전, 실질적인 변화를 이룩하도록 하겠습니다”는 각오도 밝혔다. ‘인민대중제일주의’ ‘자강력제일주의’에 기초해 새로운 발전과 번영의 길로 나가자는 것이다.

또한 “당과 인민대중의 일심단결”을 해치는 당 간부들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는 “나는 모든 당조직들과 정부, 정권기관, 무력기관들이 우리 인민을 위하여, 인민들에게 더 좋은 래일을 안겨주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며, 정성을 다해 일하도록 더더욱 엄격한 요구성을 제기하고 투쟁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주민들에게는 감사를 전하고, 당 간부들에게는 분발을 촉구한 셈이다.

특히 최고지도자가 직접 ‘정말 면목이 없다’ ‘아직 노력과 정성이 부족’ ‘인민의 믿음에 끝까지 충실할 것을 엄숙히 확언’ 등의 발언을 쏟아낸 것은 북한의 간부층에게 확실한 경고성 메시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무기 개발 속도 강조하며 미국과 장기적 협상 준비

북은 이번 열병식에서 ‘억제력 강화’를 강조하며 길이와 직경이 굵어지고 사거리가 확장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북극성-4형’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초대형방사포 등 최근 개발해온 최첨단 군사장비들을 대거 선보였다. 북의 의도는 김 위원장의 이날 연설에 잘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조선노동당이 자기의 혁명군대를 어떻게 키웠는지, 또한 그 군대의 위력이 얼만큼 강한지 똑바로 알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적으로는 주민들에게 강한 자부심을 주고, 미국을 향해 ‘무력 시위’를 한 것이다.

특히 김 위원장은 무기개발 속도를 강조했다.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5년 전 열병식에서 공개한 무기들과 비교해 빠른 속도로 첨단화되고 있는 군사력을 시위함으로써 미국에 자신들을 자극하지 말고 적대시정책을 포기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김 위원장은 미국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핵’ 대신 ‘자위적 억제력’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다른 나라를 선제공격하기 위한 공격용이 아니라 오로지 체제 수호를 위한 방어용임을 피력해 수위조절을 했다.

전반적으로 지난해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나흘 간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 미국과 장기적 대립은 불가피한 정세이고, 제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기정사실화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대미 메시지라고 평가된다. ‘각 방면에서 내부적 힘을 강화하겠다’는 정면돌파전이 경제분야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군사적 억제력 강화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열병식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단기적으로 한미합동군사연습 확대나 미국의 핵전략자산을 동원한 ‘위협’이 없다면 ICBM을 발사해 정세를 악화시킬 의향이 없다는 메시지도 함축돼 있다.

북은 당창건 75주년 행사를 마친 직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개막식을 갖고, 이달 말까지 공연하기로 했다. 코로나19 방역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일상으로의 복귀’ 쪽으로 전환하고, 대외적으로도 외교활동부터 시작해 점차 보폭을 넓혀 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행보는 ‘무력도발’보다는 ‘평화적 환경’ 조성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노동당 창건 75주년 맞아 시진핑 중국 주석이 김정은 위원장에 보낸 장문의 축전 중에 “(조선노동당과 인민이) 당건설과 경제사업을 강화하는데 힘을 넣고 일심단결하여 온갖 곤란과 도전에 대처하고 있으며 대외교류와 협조를 적극적으로 벌려 일련의 중요한 성과들을 거두고 있다”라는 대목이 들어있다. 시진핑 주석은 “지역의 평화와 안정, 발전과 번영을 실현하는데 새롭고 적극적인 기여를 할 용의가 있다”고도 밝혔다. ‘경제사업 강화’ ‘지역의 평화와 안정’ 등에 방점이 찍힌 내용이다.

3개월 뒤에 8차당대회를 치러야 하는 북으로서도 이러한 내용을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전선언’ 문제 한미에 공을 넘겨

김 위원장은 북 자체의 축하행사에서 이례적으로 ‘남녘 동포’를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보건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잡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원”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고통 받는 세계 인민들의 건강을 축원하는 가운데 의례적으로 넣은 표현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표현이다. 지난 6월의 대대적인 대남 전단 준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녘 동포’ 언급은 9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사이의 친서교환,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에 대한 북측의 신속한 유감 표명 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대목으로 보인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선언 제안에 북 측은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연설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북은 ‘종전선언’을 비핵화협상의 첫 단계에 북 측이 이행해야 할 비핵화조치에 대한 상응조치가 아니라 비핵화협상에 들어가기 전 상호 신뢰구축을 위한 미국의 실행조치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즉 미국을 향해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를 주장하는 북의 입장에서는 종전선언을 ‘대북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의사가 있다는 미국의 신뢰조치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북의 입장은 종전선언을 통해 북을 비핵화협상에 복귀시키려는 한국과 미국의 입장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러한 입장 차이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가 향후 종전선언의 실현가능성을 전망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따라서 김 위원장이 언급한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마주잡는 날’은 단순히 코로나19사태가 끝나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북미 사이의 종전선언, 남북 사이의 ‘실질적 협력조치’ 등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메시지다. 또한 남한 내의 코로나19사태 종식 시점까지 특사 교환 등 제한된 범위 외에는 남북 간 인적 교류도 불가능할 것이다.

대화국면으로의 전환은 가능할까?

김 위원장은 “주변상황도 좋지 않아 고민도, 두려움도 컸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열병식이 끝난 뒤에는 북의 첨단무기와 개발속도를 목격한 미국의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한반도정세의 상황관리를 위해 북한에게 고위급회담, 인도적 지원 등 여러 카드를 던졌지만 북은 호응하지 않았다. 지난 7월 10일 김여정 제1부부장은 담화문을 통해 “수뇌회담은 미국 측에나 필요한 것이지 우리에겐 불필요하며 무익하다”라며 미국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북미 지도자의 재회 희망’ 발언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트럼프 정부가 우려하는 군사도발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후 향후의 회담 의제에 대해 명확히 제시했다. 과거와 같은 비핵화 조치 대 제재 해제(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방식)가 아니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와 ‘조·미 협상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태풍 피해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미국이 언급하자 북은 일체의 외부 지원 거절 의사를 밝혔다.

다만 북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닫았던 북미간 뉴욕채널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 뉴욕채널을 통해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9월 코로나19와 경제 지원을 매개로 공개적으로 대화를 촉구했지만 북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주목할 대목은 이즈음 남북 사이에도 다시 소통채널이 열리고, ‘종전선언’에 대한 이야기가 직간접적으로 오가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일단 남과 북, 미국은 ‘종전선언’ 카드 활용에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핵화프로세스에서 종전선언의 위상을 둘러싼 입장차이가 아직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은 1월 중순에 개최될 것으로 예상되는 북 조선노동당 8차대회 이전까지 이러한 입장차이를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느냐 하는 점이 내년 한반도 정세를 가늠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뉴스1이 북한 전문가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의 글을 연재한다. [정창현의 북한읽기]는 북한 정치·군사·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리더십 해석’을 통해 반 발짝 앞서 북한의 변화를 읽어낸다. 정창현 소장은 서울대 대학원(국사학과)을 마치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전문기자를 거쳐 국민대·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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