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의 아름다운 우리그림
초상화(肖像畵)의 개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사회적 가치를 만든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보관해 후대로 연결하는 그림의 형식’
초상화의 대상은 동, 서양이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 왕이나 귀족, 공을 세운 장군, 혁명가, 사상가 따위로 사회적 역할이 큰 사람이다.
초상화는 당대 철학에 따른 사회적 가치가 투영되어 있다.
전쟁의 시대에는 장군이나 전쟁영웅의 초상화가 그려진다.
종교의 나라에서는 선지자나 종교지도자의 초상이, 자본주의에서는 부자의 초상화를 그린다.
공동체가 발전한 곳에서는 공공성을 가진 사람의 초상을 그리고, 개인주의가 발전하면 아무나 초상화를 그린다.
초상화를 분석하여 시대의 현상과 흐름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엄격히 통제되었다.
법률이 아니라 성리학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따른 문화적 제약이었다.
초상화에 문화적 제약을 가한 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림은 자체로 주술성과 숭배성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사회적 활동의 정점에 있는 사람의 얼굴과 결합하면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초상화 속의 사람을 숭배하거나 신격화할 수 있기에 늘 경계했다.
![태조 이성계 초상/1872년 제작.도화서에 보관하고 있는 화본(畫本)을 바탕으로 새롭게 제작한 그림이다. 얼굴, 의복의 선묘와 채색이 간결하다. 태조 이성계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는 오른쪽 상단의 글자와 왕실의 보관이다. 조선 중기까지 전형적인 초상화 방식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2/201158_81856_5639.jpg)
왕의 초상화(어진)은 국가나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공적인 사업으로 그려졌다.
어진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와 화원이 결합하여 공식적으로 제작하였다.
왕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화원이 아니라 명망 있는 학자에게 감독을 맡긴 것은 지극히 의도적이다.
감독은 그림에 조예가 있으면서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화원의 실력을 믿지 못하거나 간섭할 목적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겨야 하는 철학적 내용을 채워주기 위함이다.
아무튼 이렇게 그려진 어진은 보관했다가 왕이 죽으면 종묘에 두었다.
당연히 왕의 초상화는 숭배나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왕의 초상을 국가행사에 동원하거나 백성들에게 보이는 일은 없었다.
공신의 초상화는 그야말로 정치, 문화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관료나 선비들을 그린다.
공신 초상화는 사당에 두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열녀나 의녀의 초상화도 마찬가지이다.
공신 초상화나 의녀 초상화를 받은 가문은 사회적 평판을 높였다.
![철종 어진/도화서/비단에 채색/202*93/1861년 도사 조선/국립고궁박물관.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에 보관하던 어진들은 알 수 없는 화재에 의해 모두 불타 소실됐다.철종 어진은 왼쪽 부분의 1/3 정도가 소실되었지만 남아 있는 왼쪽 상단에 “予三十一歲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여삼십일세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이라고 적혀 있어 이 어진이 철종 12년(1861년)에 도사(圖寫)된 것임을 알 수 있다.규장각에서 펴낸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에 의하면, 이한철(李漢喆)과 조중묵(趙重黙)이 주관화사를 맡았고, 김하종(金夏鍾), 박기준(朴基駿), 이형록(李亨祿), 백영배(白英培), 백은배(白殷培), 유숙(劉淑) 등이 도왔다고 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2/201158_81857_5754.jpg)
조선시대에는 초상화보다 성명(姓名)문화가 훨씬 발전했다.
한 사람에게 아명(兒名), 본명, 자(字), 호(號), 관명 따위처럼 다양한 이름을 지어 불렀고, 제사를 지낼 때도 초상화가 아니라 이름이 새겨진 위패를 놓았다.
초상화는 엄격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그리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형식을 갖추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작품의 격과 표현된 인물의 가치가 달라진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자세는 몇 가지로 고정되어 있고 표현기법도 일정한 형식을 따른다.
형식이 없거나 전통화법을 따르지 않는 초상화는 그냥 인물화가 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미학적 이론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전신(傳神, Transmitting the spirit)이다.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준말로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전통적 초상화론이다.
이는 외형 묘사보다 인격과 내면세계의 표현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이론적 바탕이 된다.
또 하나는 일호일발(一毫一髮), ‘터럭 하나라도 또 같아야 한다’는 사실성이다.
얼굴의 잡티, 눈썹, 수염의 터럭 하나까지도 꼼꼼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조선후기의 초상화론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떠올리면 쉽다.
미술은 철학을 반영한다.
따라서 철학의 바탕을 두지 않는 미술적 논쟁은 불가능하다.
전신사조와 일호일발은 화론이지만 그 내면에는 철학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기논쟁(理氣論爭), 호락논쟁(湖洛論爭)처럼 인간의 본성과 감정, 내면과 드러남, 내용과 형식, 심성과 물성 따위에 대한 철학 문제가 투영되어 있다.
![서직수 초상/이명기. 김홍도/비단에 채색/148.8*72/1796/조선/보물 제 1487호/국립중앙박물관.그림 상단에 있는 자찬문 내용이다.‘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그림으로 이름난 이들이건만 한 조각 정신은 그려내지 못하였구나. 아깝다! 내 어찌 임하에서 도를 닦지 않고 명산잡기에 심력을 낭비하였던가! 그 평생을 대강 논의해볼 때 속되지 않았음만은 귀하다고 하겠다.병진년 하일 십우헌 예순 두 살 늙은이가 자신을 평하다.’ [자료사진 - 심규섭]](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2/201158_81858_5941.jpg)
내면을 담기 위해 외형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초상화 자체가 허술해진다.
또한 인격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다.
이를 초상화라는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표현하려면 반드시 구체적 형상이 있어야 한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와 이명기가 공동창작한 <서직수 초상>을 두고 서직수 본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화가들이라도 내면과 인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말이고, 조금 다르게 말하면 그림으로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신사조를 따르는 사람들은 초상화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림 속의 인물은 실제와 비슷하면 된다. 나머지는 그림 속에 글을 넣거나 공신첩, 책을 묶어 보완했다.
이를테면, 태조 이성계의 초상이 실제 이성계와 닮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종묘와 같은 왕실기관에 보존하고 뜻을 기리면 이성계의 초상화가 되는 것이다.
실제 이런 방식으로 많은 의녀나 공신들의 초상이 그려졌다.

지방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녀 초상이다. 임진왜란 때 살았던 계월향의 초상을 19세기 초반에 그렸다. 당연히 얼굴과 모습은 상상의 산물이다. 계월향의 행적을 그림에 써 넣었다. 왼손으로 잡고 있는 것은 김경문 장군의 옷소매를 표현한 것이다. 얼굴을 보면 눈썹이 이상하다. 잘못 그린 것인지, 신격화하려는 무교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자료사진 – 심규섭]
일호일발(一毫一髮)론에 따른 초상화는 꼼꼼한 묘사, 유려한 채색을 통해 강력한 대중성과 숭배성을 이끌어낸다.
사람은 인격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고 여긴다.
이를 깊게 관찰하여 세밀한 필치로 표현한다. 부족한 부분은 의복이나 책이나 칼, 장신구 같은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장치를 추가해 보완한다.
하지만 형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실재감이 들도록 채색하면, 인물의 인격보다는 시각적 화려함에 끌리기 마련이다.
흔히 참새를 사실적으로 그리면, “와, 정말 사진과 똑같아요. 이걸 어떻게 그렸어요?”라는 반응을 보이고, 정작 참새의 담긴 의미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풍류를 상징하는 거문고를 꼼꼼한 묘사와 유려한 채색으로 그리면, 풍류보다는 거문고의 종류와 가격에 관심이 돌려질 가능성이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금박이 들어간 화려한 옷, 고급 장신구 따위의 표현으로 나쁜 놈도 훌륭한 인격자로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흥선대원군 초상의 일부분이다. 이하응의 초상은 화본을 바탕으로 여러 점 그려졌다. 이 초상은 장식상에 여러 기물을 그렸다. 그림 속의 기물은 인물의 사회적 위치, 사상, 취향 따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자료사진 - 심규섭]](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2/201158_81860_222.jpg)
아무튼 이 둘은 인격과 내면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면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인격을 드러내는 방법(묘사의 정도나 채색법)에는 차이를 드러낸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묘사하고 채색해야 하는 지를 규범으로 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서양과 달리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해 논쟁이 많은 것은 성리학 때문이다.
성리학은 ‘사회적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사람이 주인공이다.
따라서 사람을 그리는 초상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출처 : 통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