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북(조선)은 > 목요문화역사소식 2020.12.10
1. 세계에 뛰어난 태천옻칠공예
평안북도 태천군은 옻나무 숲이 무성한 고장이다.
태천의 옻 원재료는 오래 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옻나무에서 나오는 옻은 잿빛이 도는 흰색의 액체인데 그 어떤 화학적방법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고급천연칠감이다. 그 중에서도 태천옻이 단연 으뜸이다.
옻은 공기와 접촉하면 검은색, 붉은색, 밤색으로 변하며 굳어진 다음 연마하면 현란한 광택을 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옻나무에서 얻어낸 옻의 진을 칠감으로 이용하여 기물이나 가구등 쓸모 있고 아름다운 공예품들을 만들어 왔다.
넓은잎작은키나무인 옻나무는 나라의 거의 모든 지역에 퍼져 있으며 특히 평안북도 태천군에 집중적으로 자라고있다. 태천지방의 옻은 특산물로서 부드럽고 윤택이 나고 질이 우수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태천군에서 옻나무가 잘 자라는 것은 년중 강수량이 많고 땅이 습하기 때문에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옻나무의 생장에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을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천군 학당리에 있는 옻나무군락은 천연기념물로 등록되어 보호관리되고 있다.
태천옻칠공예품들의 특징은 색채의 대조가 뚜렷하고 광택이 강한 것이다. 특히 검은색이 아닌 다른 색 계열의 옻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투명옻칠을 하는 경우에도 검은색바탕우에 하는 것이 태천옻칠공예의 고유한 기법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천연칠감인 옻으로 밥상,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화장함, 옷장, 다반을 비롯한 여러가지 생활용품과 공예품을 완성하였는데 태천에서 만든 옻칠공예품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사람들은 태천옻칠공예를 옻칠공예의 본보기로 삼았다.
각이한 역사적시기를 거쳐 발전되어 온 태천옻칠공예품은 조선왕조 말엽에 이르러서는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들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태천옻칠공예는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계승발전되고 있으며 생활에 민족적향취를 더해주고 있다. 태천지방에는 옻공예품공장이 건설되어 있고 여기서 생산되는 다양한 제품들은 사람들의 생활용품, 관상용품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2. 역사유적유물 북관대첩비
우리 나라의 역사유적유물들가운데는 북관대첩비도 있다.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에 있는 이 비는 임진조국전쟁(임진왜란)시기(1592년-1598년) 정문부의병대가 함경도지방에 침투해 들어온 왜적을 격멸소탕하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여 1708년에 세운 승전기념비이다.
높이가 187㎝이고 너비가 66㎝,두께가 13㎝인 비의 앞뒤면에는 왜적들의 침략경위와 의병부대의 조직과정,주요전투들에 대하여 1 400여자로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우리 나라를 비법적으로 강점한 일제는 거센 반일감정이 두려워 1906년에 북관대첩비를 일본으로 빼돌리는 범죄를 감행하였다. 간악한 일제는 저들의 침략행위와 수치스러운 참패상을 가리우고 우리 민족의 애국심과 반일감정을 말살하려는 야심으로 이 비를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구니신사의 한구석에 내쳐두고 비 위에 1t이상 되는 큰 돌까지 눌러 놓았다.
김정일위원장은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사를 보여주는 이 비를 찾아오도록 하였고 이에 100년만인 2006년 3월 23일에 북관대첩비는 자기 고장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보호구역의 넓이가 2만여㎡로서 자연석으로 만들어져 있고 얕은 2단 높이로 정면에서 보면 큰 화살표 모양으로 되어있는 받침돌은 건립당시의 것을 인근에서 발굴하여 사용했다.
2008년 5월 다시 함경북도 김책시를 현지지도한 김위원장은 북관대첩비를 돌아보면서 일제의 죄행을 세상에 고발하는 역사의 증견자로, 우리 민족의 반일애국정신과 억센 기상, 불굴의 투쟁정신을 보여주는 승전비로 영원히 잘 보존할 데 대하여 교시하였다고 북의 매체들이 보도한 바 있다.
3. 첫 사신도주제의 고구려벽화무덤 발굴 – 고구려의 우수한 문화적 영향 확증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지난 5월부터 6월사이에 황해남도 안악군 월지리에서 고구려벽화무덤들과 유물들을 새로 발굴하였다.
안악군 월지리의 류천, 현천지역에는 수많은 고구려무덤들이 떼를 지어 분포되어 있는데 이번에 발굴한 5기의 무덤중에서 벽화가 있는 무덤이 2기이다.
그 중에서도 류천지역에서 발굴된 벽화무덤은 사신도주제의 고구려벽화무덤으로 고고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것은 황해남도일대에서 사신도주제의 고구려벽화무덤이 발굴되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무덤안칸의 북쪽벽에는 두마리의 뱀이 두마리의 거부기를 휘감고있는 현무, 동쪽벽에는 크게 벌린 아가리로 시뻘건 혀를 길게 내밀고 갈기를 휘날리는 청룡, 서쪽벽에는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백호, 남쪽벽에는 공작새의 깃처럼 날개를 활짝 편 두마리의 주작이 그려져 있다.
천정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연꽃잎과 보리수, 거북잔등무늬들이 있으며 그밖에 지금까지 고구려벽화무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다.
현천지역에서 발굴된 벽화무덤도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진 돌칸흙무덤이며 여기서는 해를 형상한 그림을 비롯하여 많은 벽화쪼각들이 나왔다.
이번에 발굴된 무덤들에서는 큰 고리와 작은 고리, 구형의 중간장식과 살구잎모양의 드림장식으로 이루어진 금귀걸이, 네잎으로 된 꽃잎형금장식품 등 9점의 순금으로 된 가치 있는 유물들이 드러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고학학회에서는 류천무덤이 황해도일대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사신도주제의 벽화무덤으로서 그 축조시기는 6세기 전반기경이라고 확증하였으며 덕흥리벽화무덤발굴후 40여년만에 벽체와 천정구조, 벽화까지 뚜렷하게 남아있는 고구려벽화무덤이 알려지고 고구려의 문화적우수성을 보여주는 금제품들이 발굴된 것은 고고학분야의 커다란 성과라고 심의평가하였다.
이번 벽화무덤, 유물발굴의 의의는 우선 우리 나라의 중세 천년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연구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는 고국원왕릉을 비롯한 고구려벽화무덤들이 집중되어있는 안악지방이 4~5세기에 고구려의 남방진출을 위한 후방기지, 보급기지였다고 보아왔는데 이번에 6세기의 고구려벽화무덤을 비롯한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됨으로써 안악지방이 고구려말기까지 중요한 행정적 중심지였다고 보게 되었다.
다음은 발전된 고구려의 문화에 대하여 다시 한번 확증한것이다.
지난 시기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별자리들과 환상적인 벽화들, 금귀걸이를 비롯한 귀중한 유물들이 발굴된 것은 당시의 고구려천문학수준과 발전된 금속세공술, 고구려사람들의 신앙관념에 대하여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며 지난해 낙랑일대에서 남부조선의 그것보다 시기적으로 이른 태환식금귀걸이가 나온데 이어 이번에 안악군 월지리에서 세련되고 화려한 금귀걸이를 비롯한 유물들이 발굴됨으로써 백제, 신라, 가야에 미친 고구려의 우수한 문화적 영향에 대하여 다시 한번 확증하게 되였다.
지금 북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는 안악군 월지리일대에 대한 조사발굴사업을 계속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