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도 반영된 북의 언어정책, 문화어 민족 고유의 쉽고 아름다운 말과 글

1998년 평양 방문을 준비하며 있었던 일이다. 중국의 한 조선족 교수에게 북녘을 방문하고 싶다며 그곳 관계자에게 쓴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남북지역 사이에 자매결연을 추진하기 위해 북녘을 방문하고 싶으니 초청장을 보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남쪽에서는 영어를 많이 쓰듯이, 중국과 가까이 지내온 북녘에서는 한자를 많이 사용하리라 생각하고 한자로 편지를 썼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유학 (遊學)하느라 부모님에게 가끔 편지를 보냈는데, 한글보다 한자에 익숙한 아버지에게 효도한답시고 옥편을 찾아가며 한자로 편지지를 메웠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토씨 (조사; 助詞) 빼고는 거의 모든 단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북녘에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중계자가 내 편지를 조선글 (한글)로 바꾸어 평양에 전달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해방 이후 조선글과 한자를 같이 쓰다가 1947년부터 문맹퇴치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이와 아울러 한자폐지 및 조선글전용 정책을 실시해왔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편지를 보내고 난 뒤 한 달쯤 지나 중계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평양의 관계자가 베이징에서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베이징에서 만나 방북일정 및 대북 지원물품에 관해 협상을 벌이고 돌아왔는데, 당시엔 북녘 방문 자체가 뉴스거리여서 남쪽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런데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북녘 관리가 며칠 뒤 팩스를 보냈다. 󰡔한겨레신문󰡕에서 “북한측은 남한이 식용유, 비닐, 페인트 따위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 따위라니, 우리가 하찮은 물건들만 요청했다는 말이냐”는 항의였다. 한글전용 신문에서 한자어인 ‘등 (等)’ 대신 순수한 우리말인 ‘따위’로 쓴 것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물론 ‘따위’는 사람이나 사물 또는 정도 등을 비웃거나 얕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1차적으로는 앞에 나온 것과 같은 종류의 것들이 나열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그는 앞의 경우로만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앞서 1997년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 학자들의 토론회에 남쪽 대표로 참석했던 한 교수가 전해준 사연도 이와 비슷하다. 첫날 양쪽 대표들이 기조연설을 했는데, 그 토론회를 후원했던 󰡔중앙일보󰡕가 다음날 신문에 “북측 대표가 ….. 하자고 역설했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북녘 학자들이 자기네가 무슨 억지를 부렸느냐면서 발끈했단다. 힘주어 말했다는 뜻의 ‘역설 (力說)’을 반대로 말했다는 의미의 ‘역설 (逆說)’로 생각한 것이다.

 

남북 사이에 한자로 써도 통하기 어렵고, 순수한 우리말을 써도 오해하거나 잘못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하기야 외래어든 순수한 우리말이든, 한자어든 한글이든, 남쪽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알아듣지 못하거나 오해할 수 있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닌 터에 반세기 이상을 떨어져 지내온 남북 사이에는 오죽하겠는가. 북녘의 언어정책 때문에 남북 사이에 언어의 이질화가 심해졌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자들과 북녘 말이 촌스럽다고 비웃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며 북녘의 말과 글을 소개한다.

 

1. 훈민정음 창제와 ‘신지글자’

 

북녘에서는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만든 게 아니라 김일성주석의 선조가 만들었다고 선전한다는 얘기가 떠돌던 적이 있다. 조선의 백성들이 오래 전에 만든 훌륭한 글을 “김일성 수령님께서 찾아주시고, 지켜주시고, 가꾸어주셨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는 얘기는 요즘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얘기들은 맹목적 반공주의나 극단적 반북주의를 바탕으로 한 악의적 중상모략이다.

 

훈민정음 창제자와 관련하여 굳이 남북의 차이를 짚어본다면, 남쪽에서는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북녘에서는 세종왕 때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식이다. 예를 들어, 언어학자 렴종률은 2001년 <금성청년 종합출판사>에서 펴낸 󰡔조선말단어의 유래󰡕에서 세종대왕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우리의 문자는 1444년에 당시 ‘집현전’이라고 하는 과학기관에 망라되여 있던 학자집단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 출판된 󰡔조선 대백과사전󰡕은 훈민정음에 대해 “당시의 왕이었던 세종의 직접적인 주관 밑에 정린지, 최 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리 개, 리현로들이 집체적인 지혜를 모아 만들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세종에 대해서는 “비교적 풍부한 학문지식을 소유한 봉건군주”로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연구를 진행하게 하여….. 28자로 된 우리나라 문자인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2002년 <고등교육 도서출판사>에서 발간된 󰡔조선의 력사인물󰡕 제2권에서는 “력사에 이름을 남긴 세종왕”이란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직접’ 만들었다고 매우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에 세심한 관심을 돌리였고 자신이 의장격으로 앉아서 학문토론회를 자주 열었다. 따라서 과학적 발명이나 기술의 창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세종이 발안자 (생각을 처음으로 해낸 사람)였다….. 세종왕의 과학연구 사업에서 특별히 지적해야할 것은 ‘훈민정음’ 창제이다….. 세종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여 끝내 새 글자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1444년 1월 드디여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이 세상에 나왔다….. 세종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자신이 직접 참가하였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왕의 공로 중의 가장 큰 공로에 속한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정린지”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훈민정음 창제에 “정린지,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리개, 리선로 등 많은 학자들이 참가하였는데 기본 주인물이 정린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작가 박춘명은 2001년 <금성청년 종합출판사>에서 펴낸 중편소설 󰡔훈민정음󰡕에서 성삼문을 훈민정음 창제의 핵심인물로 그리고 있다. “세상에 높이 자랑할 수 있는 우수한 우리나라의 문자는 슬기로운 인민대중의 재능과 창조적 노력을 안받침해서 15세기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형상하려고” 쓴 소설에서, 측우기는 농사꾼들이 쓰던 것을 집현전 학자들이 개량했고, 훈민정음은 고조선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지글자’를 바탕으로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묘사한다. 세종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방향을 제시하자, 성삼문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글자의 원리를 찾아내고 문자유형을 확립하면서 아내와 하인 등을 통해 글자의 실용성까지 시험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녘에서는 세종대왕이 한문은 읽고 쓰기가 매우 어려워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네들까지 모두가 쓰고 읽을 수 있는 우리 글”을 만들기 위해 눈병까지 날 정도로 연구를 하면서 ‘직접’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고, 세종은 지시만 내리고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집현전 학자들 가운데 정인지가 중심인물이라는 의견도 있고, 성삼문이 핵심인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는데, 김일성의 선조가 만들었다는 터무니없는 선전은 없다.

 

그런데 앞에서 잠깐 언급한 ‘신지 (神誌) 글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 들어보리라 생각한다. 나는 1998년 동명왕릉을 방문하여 이에 관한 자료를 얻고 그곳 해설강사로부터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조선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신지는 원래 지배자나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로 이들이 사용했던 글을 신지글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렴종률은 󰡔조선말단어의 유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민은 벌써 고조선시기에 신지문자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자에 대한 기록은 󰡔평양지󰡕라는 책에도 있고 󰡔녕변지󰡕라는 책에도 있다. 󰡔녕변지󰡕에는 신지문자 16자를 소개하여 놓기까지 하였다. 신지라는 말은 사람이나 벼슬 이름으로 생각된다. 이 문자가 어떤 종류의 문자이며 문자 하나하나가 어떤 음을 표기하는가 하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 인민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자를 쓰기 전에 리두라는 문자를 썼다. 리두는 한자의 음과 뜻으로 고유 조선말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동안 리두를 써왔으나 부족점이 많고 조선어를 표기하는 문자로는 불편하여 새로운 민족문자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이르게 되었다.

 

앞의 인용문에 나오는 󰡔녕변지󰡕라는 것은 고조선시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하나로 여기에 고대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평양지󰡕나 󰡔단군세기󰡕 같은 역사서적에도 그 글자가 쓰인 흔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묘향산이나 흑룡강 등의 인근 지역에서 발굴된 고조선시대의 다른 유물 등에서도 그 글자가 쓰였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이 오랜 글자생활을 해오면서 신지글자를 바탕으로 만든 글자라는 것이다.

 

한편, 남쪽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지만, 북녘에서는 1월 15일을 훈민정음 창제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때는 음력으로 세종 25년 12월이고, 반포된 때는 세종 28년 9월 상한이었다고 한다. 북녘에서는 만든 때를 양력으로 고친 1444년 1월 중 가운데 날을 고른 것이고, 남쪽에서는 반포한 때인 9월 상순의 마지막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고친 1446년 10월 9일을 택한 것이다. 남북 사이에 만든 것과 발표한 것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기념일이 달라져버린 셈이다.

 

2. 조선어 기본자모는 자음 19개와 모음 21개

 

남북의 글 가운데 가장 큰 차이가 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철자법일 것이다. 북녘에서는 일제 식민지시절인 1933년 조선어학회가 만든 맞춤법을 조금 고쳐 1954년 <조선어 철자법>을 만들어 공포하였고, 1966년에는 <조선말 규범집>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북 사이에 크게 달라진 점 네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기본 자음과 모음 숫자가 다르다. 남쪽 한글의 기본자모는 자음 (닿소리) 14개와 모음 (홀소리) 10개로 24개이지만, 북녘 조선어의 기본자모는 자음 19개와 모음 21개로 40개이다. 북녘에서는 남쪽에서 쓰는 기본자음 14개에 ㄲ, ㄸ, ㅃ, ㅆ, ㅉ 등 된소리 (경음) 5개를 추가하였고, 남쪽에서 쓰는 기본모음 10개에 ㅐ, ㅒ, ㅔ, ㅖ, ㅚ, ㅟ, ㅢ, ㅘ, ㅝ, ㅙ, ㅞ 등 겹모음 (이중모음) 11개를 추가한 것이다.

 

둘째, 자음의 명칭이 다르다. 원래 우리글에서 자음의 명칭은 기윽, 니은, 디읃, 리을, 미음 ….. 치읓, 키읔, 피읖, 히읗 등에서처럼 첫 음절엔 ‘ㅣ (이)’를 붙이고 둘째 음절엔 ‘ㅡ (으)’를 붙여 이름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옛날 이 명칭들을 한자로 표기하던 것과 관련하여 남쪽에서는 당시의 예외를 지금까지도 인정하여 ㄱ, ㄷ, ㅅ에 대해서는 기역, 디귿, 시옷으로 정해놓고 있지만, 북녘에서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기윽, 디읃, 시읏으로 부르고 있다. 남쪽에서는 불규칙적이지만 북녘에서는 규칙적인 것이다. 된소리 5개에 대해 남쪽에서는 쌍기역, 쌍디귿, 쌍비읍 등 접두사 ‘쌍’을 이용해 이름을 지었는데, 북녘에서는 된기윽, 된디읃, 된비읍 등 접두사 ‘된’을 붙여 이름을 지었다.

 

셋째, 자음과 모음의 순서가 다르고, 이에 따라 사전의 어휘배열 순서가 다르다. 남쪽에서는 된소리를 기본자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ㄲ, ㄸ, ㅃ, ㅆ, ㅉ을 각각 ㄱ, ㄷ, ㅂ, ㅅ, ㅈ에 종속시켜 그 뒤에 배치해놓고 있지만, 북녘에서는 된소리를 기본자음으로 인정하여 ‘ㅎ’ 다음에 독립적으로 배치해놓고 있다. 따라서 ‘꽃’을 국어사전에서 찾는다면 남쪽에서는 사전의 앞부분인 ‘ㄱ’과 ‘ㄴ’ 사이에 있지만, 북녘에서는 사전의 뒷부분인 ‘ㅎ’과 ‘ㄸ’ 사이에 있다.

 

남쪽에서는 ㅐ, ㅒ, ㅔ, ㅖ 등이 각각 ㅏ, ㅑ, ㅓ, ㅕ 뒤에 오지만, 북녘에서는 ㅣ 다음에 차례로 온다. 즉 남쪽에서는 모음 21개의 순서가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이지만, 북녘에서는 ㅏ,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ㅐ, ㅒ, ㅔ, ㅖ, ㅚ, ㅟ, ㅢ, ㅘ, ㅝ, ㅙ, ㅞ이다. 따라서 ‘지식’이란 단어는 남쪽의 사전에는 ‘ㅈ’의 맨 뒤쪽에 나오지만 북녘의 사전에는 ‘ㅈ’의 가운데쯤에 나오고, ‘횃불’은 남쪽에서는 ‘ㅎ’의 중간쯤에 있지만 북녘에서는 ‘ㅎ’의 뒤쪽에 있다.

 

넷째, 두음법칙이 없으며, ‘ㅇ’은 첫소리 (초성)로서의 소릿값 (음가)이 없고 받침 (종성)으로서의 소릿값만 있다. 남쪽에서는 ‘녀자’가 ‘여자’로 바뀌거나 ‘로인’이 ‘노인’으로 바뀌는 등 ‘ㄴ’이나 ‘ㄹ’이 낱말의 첫머리에 올 때 다른 소리로 바뀌는 현상 (두음법칙)이 있지만, 북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녀자, 래일, 력사, 로인, 리해 등 원래의 소리대로 쓴다. 그리고 ‘ㅇ’은 첫소리로서의 소릿값이 없기 때문에 ‘ㅇ’이 초성으로 된 낱말은 가장 끝 자음인 ‘ㅉ’ 뒤에 오게 된다. 예를 들어, ‘아버지’나 ‘어머니’ 등은 남쪽에서는 사전 중간쯤인 ‘ㅅ’과 ‘ㅈ’ 사이에 있지만, 북녘의 사전에는 ‘ㅎ’보다 훨씬 뒤에 나오는 ‘ㅉ’ 다음인 가장 뒤쪽에 있다.

 

3. 언어정책

 

북녘의 언어정책은 한 마디로 말해 민족 고유의 말과 글을 잘 지키며 인민이 쉽게 쓸 수 있도록 다듬는다는 것이다. 이는 헌법에까지 반영되어 있는데, 제3장 54조에 “국가는 우리말을 온갖 형태의 민족어 말살 정책으로부터 지켜내며 그것을 현대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킨다”고 명시해놓고 있다. “대중이 알아들을 말, 대중이 원하는 글, 대중이 요구하는 말과 글”을 써야 한다는 언어정책은 1964년과 1966년 당시 김일성 수상이 언어학자들과 만나 교시한 내용에 크게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4년 1월 조선말에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말과 글을 응당 자랑해야 하며 사랑해야” 하고, “더욱 정확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교시하였다. 특히 다음과 같이 쉬운 말 쓰기를 강조한 것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해방 직후부터 힘든 말을 쓰지 말고 쉬운 말을 쓸 것을 주장하여 왔으나 아직도 대중이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남이 모르는 한자어를 많이 쓰는 것을 유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이런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쉬운 말을 하고 쉬운 글을 쓰는 것이 더 유식하고 고상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원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정통한 사람들은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도 모든 리론을 알기 쉽게 잘 해설합니다. 그런데 리론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책에서 문구를 따기 좋아하며 힘든 말을 늘어놓아 남이 알아들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1) 문맹퇴치

 

북녘에서 말과 글을 쉽게 쓰자고 한 가장 큰 배경은 해방 직후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방과 함께 잃어버릴 뻔했던 우리말과 글을 되찾기는 했지만, 당시 인구의 약 80%가 글을 읽지 못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장애요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6년부터 ‘건국사상 총동원운동’과 아울러 문맹퇴치 운동을 당면 과업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사업은 국가기관의 책임 아래 당인민위원회와 사회문화단체 및 교육출판기관들이 교과서와 학용품 등을 제공하며 12살 이상 50살 미만의 문맹자들이 모두 글을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농민들을 위해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1차는 1947년 12월부터 1948년 3월까지, 2차는 1948년 12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집중적으로 글을 가르쳐 문맹자를 거의 없앴다고 한다. 그 결과, 1988년 평양 백과사전출판사에서 출판된 󰡔조선개관󰡕에 따르면, “해방 후 4년도 못되는 기간에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30만의 문맹자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2) 문자개혁

 

1940-50년대 북녘의 언어정책을 주도했던 사람은 이 책 제2부 2장에서 소개한 ‘옌안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두봉 부수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제하에서 ‘주시경의 수제자’로 조선어문을 연구하다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1945년 북녘으로 들어가 정치와 언어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문자개혁을 주장했다. 조선글이 네모난 것이어서 쓰기가 좀 불편하고, 주로 음을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발음하기는 좋지만 단어 형태로 된 것이 아니며, 글이 보기가 좀 어렵고 쓸 때는 조금만 획을 달리 해도 곤란하고, 타자하기가 힘들어 인쇄의 기계화에 불리하다는 등의 이유였다. 그러나 그는 1958년 숙청당하고 말았는데, 문자개혁을 반대했던 김일성 수상은 1964년 언어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어떤 사람들은 문자개혁을 곧 하자고 하였으나 우리는 그것을 결정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언어는 민족을 특징짓는 공통성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입니다….. 조선인민은 핏줄과 언어를 같이 하는 하나의 민족입니다. 미제의 남조선 강점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우리 민족은 하나입니다. 지금 남조선 사람들이나 북조선 사람들이나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며 같은 문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들의 주장대로 문자개혁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북조선 사람들이 서로 다른 글자를 쓰게 되면 편지를 써보내도 모르게 되고 신문 잡지를 비롯한 출판물도 서로 알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조선인민의 민족적 공통성을 없애며 결국은 민족을 갈라놓는 엄중한 후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는 신문 잡지를 비롯한 모든 출판물들이 다 우리 글로 나오고 있으며 인민들이 그것을 읽고 리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문자를 고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문맹자로 되여버릴 것이며 모두 다 글을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책들과 그 밖의 출판물들도 다 새 글자로 다시 써놓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글에 일정한 결함이 있으니 만큼 앞으로 그것을 고칠데 대하여 연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고치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보기도 쉽고 타자도 문자의 기술화도 빨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개혁을 하더라도 남북이 통일된 다음에 우리의 과학기술이 세계적 수준에 오른 다음에 하여야 합니다. 그때에 가서는 문자를 고쳐도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글을 쓰는 일이 없게 될 것이며 또 사람들이 새 문자를 배우는데 일정한 시간이 걸려도 과학문화의 발전에 별로 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남북조선 사람들이 다 같이 쓰고 있는 문자를 그대로 써야 하며 이것을 가지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 글자에 분명히 결함이 있고 불편한 점이 있지만,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문자를 개혁하면 민족적 공통성을 없애고 분단을 고착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일성은 “조국통일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므로 글자를 개혁할 준비는 미리 해야 된다고 말했다. 문자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시기를 반대한 셈이다.

 

(3) 한자폐지와 조선글전용

 

북녘 언어정책의 주요 내용은 “민족 고유의 말과 글을 잘 지키며 인민이 쉽게 쓸 수 있도록 다듬는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를 위해 꼭 필요한 조치 가운데 하나가 한자를 폐지하는 일이었다. 문맹퇴치와 아울러 노동자와 농민들이 쉽게 글자를 익히고 쓸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배우기 어렵고 쓰기 힘든 한자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한자는 지난날 “봉건통치배들의 사대주의” 때문에 남용된 측면이 크기 때문에 봉건주의와 사대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도 한자 폐지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47년부터 󰡔로동신문󰡕을 비롯한 대부분의 출판물이 조선글을 전용하거나 극히 부분적으로 한자를 겸용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수상은 한자를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문자개혁을 할 수 없다고 했듯이, 남쪽 사람들이 한자를 쓰는 한 북녘 사람들도 어느 정도 한자를 알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문자개혁 및 한자폐지를 통일문제와 결부시킨 것이다. 한자폐지와 관련하여 김일성이 1964년 언어학자들에게 교시한 내용을 아래에 옮긴다.

 

한자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한자를 만들어낸 중국사람 자신도 배우기 힘들고 쓰기 불편하여 앞으로는 버리자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쓰겠습니까? 한자는 하나의 다른 나라 글로써 일정한 시기까지만 써야 합니다. 한자문제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통일이 언제 될는지 누구도 찍어서 말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미국 놈이 망하고 우리나라가 통일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조선 사람들이 우리 글자와 함께 한자를 계속 쓰고 있는 이상 우리가 한자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한자를 완전히 버리게 되면 우리는 남조선에서 나오는 신문도 잡지도 읽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일정한 기간 우리는 한자를 배워야 하며 그것을 써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리 신문에 한자를 쓰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출판물은 우리 글로 써야 합니다.

 

김일성주석은 한자를 될수록 쓰지 않되 학생들에게는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지난날 출판된 고전들이나 남쪽에서 나오는 출판물들에 한자가 많이 사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교과서에 한자를 쓰면 남쪽처럼 될 수 있으니 어떠한 형식으로든 교과서에 한자를 사용해서는 안되고 한자를 하나의 외국어로 교육시키라는 지시를 곁들였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은 “사대주의병에 걸려” 사람 이름도 한자로 지었지만, 앞으로 어린이들의 이름은 될수록 고유어로 짓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에 이미 많이 섞여있는 한자어가 문제였다. 김일성주석은 “옛날사람들이 쓰다가 버린 한문투의 말들이 많이 되살아나오고,” 또한 “한자를 되는대로 섞어 만든 단어들이 자꾸 나오고” 있다며, “꼭 써야 할 한자어들을 일정한 정도에 국한시켜놓고 그 이상 자꾸 만들어 쓰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뽕잎’, ‘뽕밭’, ‘뽕나무’라고 하면 될 것을 ‘상엽’, ‘상전’, ‘상목’이라고 말하면 젊은 사람들이 알기 어려울 텐데, 특히 “‘상전’이라고 쓰면 아마 젊은 사람들은 괴뢰들이 미국놈을 자기들의 주인으로 모신다고 욕할 때 쓰는 ‘상전’과 헷갈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누에치기’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양잠’이란 말을 쓰고, ‘돼지우리’라고 하면 될 것을 ‘돈사’라고 하며, ‘담배’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연초’라고 쓰고, ‘돌다리’라는 쉬운 말 대신 ‘석교’라는 어려운 한자어를 쓰면 바람직하지 않다며, 숫자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십구세’ 대신 ‘열아홉살’이라고 하는 등 조선말을 쓰자고 했다.

 

또한 인민들이 많이 쓰는 한자말이라도 그에 맞는 고유어가 있으면 사전에서 빼버리고 고유어를 쓰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하복’이란 말은 비교적 많이 쓰이고 있지만 ‘여름옷’이라고 쓸 수 있으니 사전에서 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말과 고유어가 뜻이 같으면서도 뜻의 폭이 꼭 같지 않은 것들은 잘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김일성주석이 1966년 언어학자들에게 제시한 사례가 재미있어 그대로 소개한다.

 

례를 들어 ‘지하’와 ‘땅속’, ‘심장’과 ‘염통’은 뜻이 같지만 그 폭이 다르므로 한자말과 고유어를 다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지하투쟁’이란 말을 ‘땅속투쟁’이라고 고치거나 ‘평양은 나의 심장’이란 말을 ‘평양은 나의 염통’이라고 고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런 한자말까지 모조리 없애버린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에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유어와 한자말이 뜻이 같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경우에 따라 서로 달리 처리하여야 합니다.

 

이와 아울러 이미 조선어로 되어버린 한자어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자말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인식되고 우리말로 완전히 굳어버린 것”은 그냥 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학교’나 ‘삼각형’ 같은 말은 이미 우리말로 굳어져 버렸으니 굳이 ‘배움집’이나 ‘세모꼴’로 고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자폐지 및 조선글전용과 관련하여 우스개 얘기 한 가지 소개한다. 몇년 전 북녘에서는 외래어를 많이 쓰지 않고 우리말을 잘 가꾸고 다듬어 쓴다는 내 말을 들은 한 학생이 그러면 북녘에서는 전구를 뭐라고 부르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북녘에 관해 공부하고 강의하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느냐며 ‘불알’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형광등은 길쭉하니까 ‘긴불알’, 네온사인은 울긋불긋 색깔이 들어있으니 ‘색불알’, 샹들리에는 여러 개의 전구가 붙어있어서 ‘떼불알’, 형광등 초크는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므로 ‘씨불알’이라고 부른다는 꽤 그럴싸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나중 것들은 우스개 얘기로 지어낸 것이겠지만, 전구를 ‘불알’이라고 한다는 얘기는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우리 남쪽에서도 ‘전기’를 ‘불’로 많이 써왔고, 1998년 방북했을 때 안내원이 신호등을 ‘불신호’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방북하여 마침 안내를 맡은 조선어학자에게 북녘에서는 전구를 뭐라고 부르냐니까 ‘전구알’이라고 했다. 전구를 혹시 ‘불알’이라고 하지는 않느냐고 물으니 얼마 전에 재미삼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단다. 그럼 형광등은 뭐라고 부르냐는 질문에는 “우리도 형광등이라고 합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얘기 끝에 내가 ‘전구알’은 잘못된 말이라고 지적해주자 얼른 알아차렸다. ‘구 (球)’가 공이나 알을 뜻하기 때문에 전구라고 하든지 불알이라고 해야지 ‘전구알’이라고 하면 말이 반복되어 ‘역전앞’ 같은 단어가 되어버린다는 뜻이었다.

 

(4) 말다듬기: 외래어 정리

 

인민들이 쉽게 우리말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맹퇴치 운동과 한자폐지 및 조선글전용 정책을 1940년대부터 시작한 데 이어, 1960년대에는 말다듬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말을 쉽고 편하게 쓰기 위해 잘 다듬어야 한다는 취지였는데, 한자말과 일본식 말 등 외래어를 고유어로 바꾸는 게 핵심이었다.

 

방언에서 좋은 말을 찾아 쓰고, 지역이름이나 곡식과 과일이름 등도 고유한 말로 다듬었다. 한자어와 고유어가 뜻이 다를 경우엔 둘 다 썼고, 학술용어도 우리말로 다듬되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풀어쓰지는 않았다. 이러한 말다듬기 운동은 일반어 이외에 사회과학, 자연과학, 의학, 농학, 체육, 문학예술 등 각 분야별로 이루어졌다.

 

1986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에서 나온 󰡔우리나라에서의 어휘정리󰡕는 조선말이 많은 우수한 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몇 가지 결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부족점으로 되는 것은 중요한 언어단위인 어휘부문에 외래적인 것이 많이 들어와 있는 것”이라며, 외래어를 정리하는 것이 조선말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 문제라고 했다. 이에 따라 “인민들의 언어생활에 쓸데없는 부담을 주고있던 어렵고 까다로운 한자말들과 외래어들 그리고 비문화적인 낡은 어휘들”을 정리하여, 조선어는 “고유어를 기본으로 하여 더욱 아름답고 풍부하게 발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다른 나라의 고유명사는 일본말이나 중국말로 발음할 것이 아니라 그 나라 발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며, 특히 나라 이름은 그 나라 말로 써야 한다는 원칙을 표명했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는 ‘로씨야’, 스페인은 ‘에스빠냐’, 멕시코는 ‘메히꼬’, 스웨덴은 ‘스웨리예’, 벨기에는 ‘벨지끄’, 덴마크는 ‘단마르크’, 폴란드는 ‘뽈스까’, 터키는 ‘뛰르끼예’, ‘캄보디아’는 ‘캄보쟈’, 베트남은 ‘윁남’으로 쓰는 식이다. 남쪽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이름을 거의 모두 영어식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북녘에서 쓰는 이름들이 매우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이렇게 해당 국가의 말로 표기하는 게 더 바람직한 게 아닐까.

 

이러한 말다듬기 운동 역시 1964년과 1966년 김일성 수상이 언어학자들에 내린 교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먼저 1964년 교시에서 “우리는 될수 있는대로 외래어를 쓰지 말고 자기 나라 말을 쓰도록 하여야” 된다고 했다. 해방 직후 당의 고위 간부가 “멋을 부리느라고 ‘이데올로기야’니 ‘헤게모니야’니 하는 말을 마구 쓰면서 조선어를 로어화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며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외래어를 버리고 고유어를 무조건 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은 외래어를 다 없앨 수는 없고 어느 정도 쓰는 것은 피할 수 없다며, 특히 과학기술분야에서는 외래어를 적지 않게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뜨락또르’ 같은 것은 원래 조선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전문가들과 협의해서 그냥 쓰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1966년 교시에서는 앞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새로 들어오는 외래어들은 우리말로 제때에 고쳐야” 한다며, “어떤 나라나 다 과학기술이 먼저 발전한 나라를 따라가기 마련”이지만, 외래어가 처음 들어올 때 조선말로 고치면 된다고 했다.

 

1986년 김일성종합대학 출판사에서 펴낸 조선어학과용 교재인 󰡔어휘론󰡕을 보면, “민족어를 주체성있게 발전시켜 나가자면 외래적 요소라고 하여 덮어놓고 버리려고 하여서도 안되며, 고유어라고 하여 무조건 살리려는 태도도 버려야 한다”고 했다. 비록 외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조선어로 완전히 굳어버린 말은 살리고, 반대로 고유어라고 하더라도 봉건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이어서 “인민들의 혁명적 지향에 맞지 않는” 말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주석은 조선이 중국, 일본, 소련과 같은 큰 나라들 사이에 있어서 “지난날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서 이 나라들에 대한 사대주의가 생겨났으며 이 나라들과의 정치적 접촉과 경제 문화적 교류 과정에서 이 나라들의 말이 우리나라에 적지 않게 들어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조 봉건시기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심하여 그 나라의 말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우리 사람들이 중국식 한자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일군들이 ‘일하는 시간’이라는 말을 ‘사업시간’, ‘공작시간’이라고 하고 ‘낮잠’을 ‘오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 전형적 실례로 될 수 있습니다…..

 

지난날 일제놈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다음에는 일본말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 가운데는 고쳐야할 일본식 말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일제때 살아보지도 못한 우리의 어린이들까지도 ‘양복저고리’를 ‘우와기’라고 하고 마시는 ‘차’를 ‘오차’라고 하며 차그릇을 받치는 ‘차반’을 ‘오봉’이라고 합니다.

 

해방된 다음에는 로어가 들어와서 우리말에 뒤섞이려 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우리나라에 순수한 조선말이 아닌 중국 간도지방에서 사는 조선 사람들이 쓰는 중국식 조선말도 들어오고 해방 후에 남조선 사람들이 쓰는 조선말에 영어와 일본말과 한자말이 뒤섞인 범벅이말도 들어오고 귀국 동포들을 통하여 일본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하는 일본식 조선말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언어 사용에서의 사대주의와 관련하여 김일성주석은 “모든 사람들이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쓰는 사람은 민족적 긍지가 없는 사람이고, 자기 나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유식하고 민족적 자부심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김정일 비서 역시 1973년 펴낸 󰡔영화예술론󰡕에서 “아름답고 섬세하며 뜻이 풍부한 우리말을 더 많이 살려 씀으로써 사람들에게 자기 민족의 말을 잘 아는 사람이 문명하고 애국심이 높은 사람이라는 관점을 똑똑히 세워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주석은 조선어를 잘 다듬으면서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상토론을 해야 한다고 교시했다. “언어학도 대중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다듬을 말을 중앙신문에도 내고 지방신문에도 내어, 대중의 평론과 질문 그리고 반대 의견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였다. 또한 “지상토론을 많이 하여야 우리말이 잘 다듬어질 뿐 아니라 그것이 대중 속에 널리 알려진다”며, 이와 같이 대중의 평론과 좋은 의견들을 모아 “마지막에 표준으로 삼을 말을 정하여 쓰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말다듬기는 서두르지 말고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하나 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모든 단어를 하루이틀 사이에 갑자기 조선말로 고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몇십 몇백년 동안 내려온 말을 하루아침에 다 고친다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물론, 고친 사람들 자신도 모두 기억하지 못하여 다 쓰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새로 다듬은 조선말들을 대중 속에 빨리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인민학교에서부터 먼저 받아들이게 하면서,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틀린 말을 고쳐주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늙은이들이 ‘오침’이라고 하면 어린이들이 제때에 ‘낮잠’이라고 고쳐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을 위해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학자들이 옛날책을 번역한 것을 보면 많은 한자말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번역된 고전들을 읽고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들이 옛날책을 잘 읽으려 하지 않고, 옛날책을 읽지 못하다보니 민족적 풍속도 모르고 례절도 잘 지킬 줄 모른다”며 이 문제를 꼭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 문화어: 평양 중심의 표준어

 

북녘의 문화어란 남쪽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말사전󰡕에 따르면 “혁명의 수도 평양을 중심지로 하고 평양말을 본보기로 하여 잘 가꾼 말”이다. 김일성 수상은 1964년 교시에서 조선말을 발전시키려면 “어떤 다른 나라 말을 본받아도 안되며 또 영어나 일본말이 많이 섞여든 서울말을 표준으로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조선의 고유한 말을 기본으로 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북녘에서 조선말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6년 교시에서는 “혁명의 참모부가 있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방면에 걸치는 우리 혁명의 전반적 전략과 전술이 세워지는 혁명의 수도이며 요람지인 평양을 중심으로 하고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언어의 민족적 특성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아울러 ‘표준어’라는 말 대신 ‘문화어’라는 말을 써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표준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표준어’라고 하면 마치도 서울말을 표준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리해될 수 있으므로 그대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는 우리가 혁명의 수도인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여 발전시킨 우리말을 ‘표준어’라고 하는 것보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문화어’란 말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고쳐쓰는 것이 낫습니다.

 

실제로 김일성주석은 남쪽에서 쓰는 말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1964년 교시에서도 “지금 남조선 멋쟁이들은 영어와 일본말을 망탕 섞어 쓰면서 우리말을 못쓰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1966년 교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의 강도를 훨씬 높였다.

 

문제는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에 있습니다. 지금 남조선 신문 같은 것을 보면 영어나 일본말을 섞어 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한자말은 중국 사람들도 쓰지 않는 것까지 망탕 쓰고 있습니다. 사실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에는 한자말과 일본말, 영어를 빼버리면 우리말은 ‘을’, ‘를’과 같은 토만 남는 형편입니다. 언어는 민족의 중요한 징표의 하나인데 남조선에서 쓰고 있는 말이 이렇게 서양화, 일본화, 한자화되다보니 우리말 같지 않으며 우리말의 민족적 특성이 점차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두다가는 우리 민족어가 없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김일성주석은 남쪽에서든 북녘에서든 “민족적 량심을 가진 조선 사람치고 우리말의 민족적 특성이 없어져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며, “남조선에도 지주, 매판자본가, 반동관료배들을 내놓고 절대 다수의 인민대중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며 우리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니 그들 모두 “우리 민족어의 발전을 바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앞에서 소개한 󰡔우리나라에서의 어휘정리󰡕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6년)는 “공화국 북반부에서 어휘정리를 잘하는 것은 남조선 인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어의 순수성, 고유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도록 고무추동하게 되며, 앞으로 나라가 발전된 다음 우리 민족어를 전국적 범위에서 통일적으로 발전시켜 나기기 위한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화어운동은 1968년 계간지 󰡔문화어학습󰡕이 창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잡지는 인민대중을 위한 조선어 학습지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방송을 통해 문화어운동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북녘에서는 “방송원의 말은 문화어 화술이다”며, 방송인의 언어 사용을 매우 중시한다. 방송의 청취 대상이 다양하고 그 범위도 매우 넓어서 방송에서 쓰는 말은 인민대중의 언어생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1988년 평양 예술교육출판사에서 펴낸 󰡔방송원화술󰡕이란 책을 보면, “방송원의 말은 문화어 화술이다”는 장에서, 남쪽 방송에서 쓰는 서울말은 “고생하며 가난하게 사는 로동자, 농민들이 좋아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면서 “그것마저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절반이상이나 섞인 잡탕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를 두고 김일성은 “오늘 평양말은 서울말보다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 우리의 방송원들이 온 나라에 대고 이 좋은 평양말로 방송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며 떳떳한 일인가”고 말했다.

 

󰡔조선개관󰡕 (평양 백과사전출판사, 1988)은 “오늘 남조선에서는 우리말과 글이 엄중한 위기를 겪고 있다. 남조선에서는 우리말의 순수성이 점차 사라지고 잡탕말로 변하여가고 있으며 우리글은 한자와 외래어에 뒤섞이여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99년 4월 󰡔로동신문󰡕은 당시 남쪽에서 외래어와 한자어의 남용으로 순수한 민족어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남북 언어의 단일성마저 상실되어가고 있다며 남쪽의 언어실태를 신랄히 비판했다. “남조선에서는 지금 우리 민족어가 외래어에 질식되어 없어질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특히 거리의 간판과 상표, 영화제목 광고가 온통 외래어 투성이라고 지적하고 신문 방송 출판물에서도 문법에 맞지 않고 뜻도 모호한 잡탕말을 망탕 쓰다보니 도무지 어느 나라 글인지 분간 못할 정도라고 혹평한 것이다.

 

그러나 북녘 사람들의 언어 사용엔 맘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말투가 거칠고 전투적인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혁명의 수도 평양말”을 강조하면서 혁명을 추구하는 가운데, 언어를 혁명의 무기, 선전 교양의 수단, 투쟁의 도구 등으로 삼으면서, 바람직한 언어법으로 “문체의 간결성, 정확성, 명료성”을 통한 “말과 글의 전투성 및 호소성”을 들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내가 미국의 호전적인 대외정책을 몹시 싫어하지만, “미제의 각을 뜨자”는 북녘의 말에서 살벌함이나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화어의 억양이 씩씩하고 기백이 있는 약동적 발음이라고 주장하며 높내림조의 억양을 사용하여 전투적이고 선동적인 효과를 내려고 하지만, 비폭력을 통한 평화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곱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다.

 

4. 남북의 언어통일을 위하여

 

남쪽의 말과 글에 대한 북녘의 비판이나 혹평에 대해 남쪽에서는 상투적 비난이라고만 치부할 게 아니라 외래어의 오용과 남용에 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남쪽에서 대학교수들을 비롯한 지식층 사이에서는 영어단어 몇 개 사용하지 않고 말 한마디 또는 글 한 줄 제대로 끝낼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예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나야 미국생활 10여년 했으니 영어사용이 늘어나면 개인적으로는 좀 이득을 볼지 모르지만, 쉽고 아름답고 훌륭한 우리말을 놔두고 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 심각하고 한심한 문제는 이들이 영어단어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거나 국적 불명의 잡탕말을 영어로 착각하고 쓰면서 순수한 우리말을 촌스럽다고 비웃고 있다는 것이다. 기막힐 노릇이다. 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을 펼쳐오면서, 이러한 예를 수백개 수집해 왔는데 몇 개만 소개한다.

 

요즘 누구에게나 필수품처럼 되어버린 휴대전화를 대부분 ‘핸드폰’이라 부르는데 이런 영어는 없다. 영어로는 ‘cellular phone’ (또는 줄여서 cellphone)이나 ‘mobile phone’이라 불린다. 이에 관해 어이없는 얘기 한 토막 전한다. 몇년 전 한 정치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는데 주최측에서 참가자들에게 연락처를 적어달라며 종이 한 장을 돌렸다. 하필 내가 가장 먼저 받았는데, 이름, 전화, H.P, 이메일이 위에 적혀 있었다. H.P가 뭘까 머뭇거리다 홈페이지 주소를 썼는데, 한 바퀴 돌고 나에게 되돌아온 종이를 받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놓은 게 아닌가. 휴대전화를 갖지도 않고 ‘핸드폰’이란 말을 쓰지도 않던 터라 H.P라는 말을 몰라 멍청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동차 역시 넘쳐나고 있는데 모두들 운전대를 ‘핸들’이라고 부르지만 ‘steering wheel’이 진짜 영어다. 운전대 위에 걸린 거울을 ‘빽밀러’라고 부르는데 영어로는 ‘rear-view mirror’다. 젊은이들이 즐겨먹는 ‘함박스텍’은 ‘hamburger steak’이며, ‘돈까스’라는 말은 ‘pork cutlet’이란 영어에서 ‘pork’는 돼지 ‘돈 (豚)’자로 바꾸고 ‘cutlet’은 일본식 발음으로 옮겨 섞어놓은 것이니 도대체 이것도 말인가.

 

인사도 영어식 말투로 바뀌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예를 들어, “좋은 아침 되세요” 또는 “좋은 시간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떻게 아침이 되고 시간이나 하루가 될 수 있겠는가. 영어의 “Good morning”이나 “Have a good time (nice day)”를 본딴 것 같은데, ‘좋은 아침’이나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해야 바른 말이 되는 것이다.

 

‘휴대전화’나 ‘운전대’ 같이 우리말로 쓸 수 있다면 쉽고 소박하게 우리말을 쓰자. 국제화 또는 세계화시대를 맞아 한 마디라도 영어를 쓰고 싶으면 ‘cellular phone’이나 ‘steering wheel’ 같은 진짜 영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기 바란다. 그리고 북녘의 우리말 다듬기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본받지는 못할지라도 비웃거나 비아냥거리지는 말자. 국적 불명의 잡탕말을 영어로 착각하고 쓰거나 외국어를 제대로 알고 쓰지 못하면서, 순수한 우리말을 촌스럽다고 여기는 짓이야말로 조롱과 경멸을 받아야할 한심스러운 일이다.

 

영어뿐만 아니라 한자어 사용에도 잘못된 것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회의나 선거를 할 때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과반 (過半)’이 ‘절반 이상’이라는 뜻이므로 ‘과반수 찬성’ 또는 ‘반수 이상 찬성’이라고 쓰는 게 옳다. 무슨 행사를 치를 때 “자리에 착석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착석 (着席)’이 ‘자리에 앉다’는 뜻이므로, “자리에 앉아주십시오”라고 하든지 ‘자리에’라는 말을 빼고 그냥 “착석해주십시오”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도 이런 말이 나오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요즘 음식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과 관련하여 “잔반을 남기지 말자”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데, ‘잔반 (殘飯)’이 ‘먹고 남은 밥’을 가리키므로 “밥을 남기지 말자”고 해야 맞다. ‘낙엽 (落葉)’은 ‘떨어진 잎’이라는 말이므로 “낙엽이 날린다”거나 “낙엽이 뒹굴다”는 말은 좋지만, “낙엽이 떨어진다”는 말은 옳지 않고, “나뭇잎이 떨어진다”고 해야 옳다. ‘열기 (熱氣)’는 ‘뜨거운 기운’이라는 뜻이니 여기저기서 자주 듣게 되는 “열기가 뜨겁다”는 말은 부적절하고, “열기가 고조된다”거나 “열기로 가득차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해변 (海邊)’이 ‘바닷가’를 뜻하므로 ‘해변가’라고 쓰는 것도 잘못이고, ‘백사장 (白沙場)’이 ‘흰 모래밭’을 가리키므로 ‘백사장 모래밭’이란 말도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존재하고 있다”는 말도 ‘존재한다’거나 그냥 ‘있다’고 하면 되는데 너무 많이 쓰는 탓인지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를 인정하고 있으니 의아하다. 아무튼 ‘자리’, ‘밥’, ‘나뭇잎’, ‘바닷가’, ‘모래밭’이란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면 무식한 것 같고, ‘좌석’, ‘잔반’, ‘낙엽’, ‘해변’, ‘백사장’ 등의 어려운 한자어를 써야 유식하고 고상한 것처럼 생각하는 탓이겠지만, 한자의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잘못 쓰는 것이야말로 무식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북녘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말다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새로운 말을 무려 수만 개나 만들어 냈다고 하니 이 때문에 남북 사이의 언어에 혼란이나 이질화가 빚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남쪽이 무분별하게 외국어를 받아들이며 온갖 잡탕말을 만들어낸 게 더 큰 혼란과 이질화를 불러온 주범 아닐까.

 

한편, 북녘에서는 남쪽에서 널리 쓰이는 ‘표준어’라는 말 대신 ‘문화어’라는 말을 즐겨 쓰듯이, 남쪽에서는 해방 이전부터 널리 써왔고 영어의 ‘people’을 가장 정확하게 옮긴 ‘인민’이라는 말을 북녘에서 많이 쓴다고 일제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국민’이라는 말을 써오고 있다. 같은 이유로 ‘동무’라는 순수하고 정겨운 우리말을 중국에서도 쓰지 않는 한자어 ‘친구’로 쓰고 있다. 그리고 ‘노동’이란 쉽고 일반적인 말 대신 좀 어렵고 애매한 ‘근로’라는 말로 바꿔 써왔다. ‘노동’이란 말을 사회주의의 ‘노동계급’ 또는 마르크스의 ‘노동착취’ 등과 연계시켜 반공의 대상으로 삼아 금기시하는 것이다. 하기야 ‘근로 (勤勞)’라는 말은 힘써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이니 자본가 쪽에서는 ‘근로자’ 즉 열심히 일하는 사람만 진짜 노동자로 삼고 싶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1989년 평양을 방문했던 문익환 목사의 제안에 따라 2005년부터 남북이 공동으로 󰡔겨레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벌여오고 있다. “모국어 공동체의 발전과 남북의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남북이 손을 잡고 “민족문화의 생명줄”인 우리말과 글을 함께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말과 글의 이질화를 줄이며 남북이 함께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것도 진정한 민족통일을 준비하는 숭고한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글 이재봉

필자소개: 하와이대학교 정치학박사,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명예교수, 남이랑북이랑 대표,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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