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에서 본 2021년 미얀마 군사구테타

이글은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올려진 언론학 박사이며 현재 미얀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일상교수의 글이다.

제가 현지에서 취재해 본 바로는 아웅산수치가 영국의 조종을 받는 실질적 멍청이 군주이고 그 허수아비가 현재 대통령입니다. 언론매체가 심층보도를 못해서 아웅산수치가 민주화의 상징처럼 보여지지요. 아버지 아웅산은 버마 독립의 영웅이지만 영국이 용도폐기하였고 그 딸을 어려서 조종한 것은 영국정보당국입니다. – 유일상교수

우리 국민들이 내용도 모르고 서방언론보도나 갑자기 들어간 현지특파원 말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하고 있네요. 아웅산수치가 허수아비 동창대통내세워 엉터리 선거한 것인데 뒤에는 영국이 있지요. – 유일상교수

 

2021년 2월 미얀마 군사쿠데타를 짚어보는 시론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군사쿠데타를 성사시켰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미얀마 여러 곳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취재한 경험에 기초하여 이번 쿠데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언론의 심층 보도가 없다보니 미얀마인 유학생의 유투브나 역사적 정보에 무지한 소셜미디어의 글들이 어지럽고, 우리나라의 5·16이나 5·18처럼 군부에 대한 시민들의 시위로 오인하거나 시위노래로 ‘님을 향한 행진곡’ 등이 불려 진다는 선정적 보도가 고작인 게 답답하다. 가급적으로 시사 문제에 대한 해설·논평 등을 쓰지 않기로 했지만 워낙 답답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필자는 현직에 있을 때, 조중동, 문화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한겨레를 비롯한 여러 일간지나 시사 잡지에 수많은 칼럼을 썼고, 그것을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한 것도 4권이나 된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사칼럼이다. (200자 원고지 약 30매 분량)

미얀마의 정권은 건국 초기부터 군사정권이었다. 최근에 민주화운동을 이끈다고 알려진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웅산(Aung San) 장군은 탁월한 군인이었다. 그는 버마 독립을 위해 일본군에서 훈련받은 버마 무장독립운동가 가운데 30인 동지회의 1인이다. 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버마독립전쟁을 통해 영국군을 물리치다가 일본군의 무리한 인도 진격작전(Impal작전) 과정에서 영국군과 접촉해 독립을 약속받았다.

제2차 대전 종전 후에 영국은 식민통치를 계속하려 했고, 아웅산 장군을 비롯한 군부는 이에 맞섰으나 일제의 간첩 혐의로 영국군에 체포되어 우간다에 수용되어 있던 독립운동 동지인 우소(U Saw)의 조직원에 1947년 6월 암살되었다. 우소는 확실한 증거도 없이 사건 발생 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합법 절차를 거쳐 1948년 5월 처형되었다. 일련의 과정에 영미 정보기관의 배후조종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우리나라 해방 직후, 민족지도자들의 잇단 암살을 연상하라.

1948년 1월 랭군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인 우누(U Nu)를 수상으로 하는 독립국 버마연방이 성립되었으나 중국 국민당 패잔군대와 미국 정보기관이 버마의 동북부 지역에서 공공연히 소수민족을 지원하고 아편 밀무역을 조장하는 등으로 버마 주권을 폄시(貶視)하자 네윈(중국계)이 군총사령관을 맡은 버마 국군이 이를 소탕했다.

네윈(Ne win)은 1958년 우누와의 협약 하에 정권을 맡았다가 1960년 총선에서 우누가 재집권했으나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1981년부터는 사회주의계획당(BSPP) 당수로 1988년까지 통치했다. 그에 이어 버마족인 소마웅(Saw Maung)장군이 1992년까지 수상을 맡았고 그 뒤를 탄쉐(Than Shwe)가 이었지만 2007년의 대규모 시위로 테인세인(Thein Sein. 중국계)이 다시 수상을 맡아 군정 주도의 정치체제 개혁이 시작되고 2008년 5월 신헌법 초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가결되어 민주화 일정이 정해졌다.

2010년 11월 새 헌법에 따른 총선거가 실시되고 총선 직후에 아웅산수치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2011년 3월 30일 테인세인 장군이 제대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의회 의결을 거쳐 대통령에 취임했고 11월 아웅산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정당으로 다시 등록했다.

아웅산수치는 아웅산 장군의 딸로 랭군의 영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도 뉴델리대학을 거쳐 영국에 유학했다. 그의 남편은 영국인이고 미국 샌디에이고로 이민한 그의 오빠는 여동생의 정치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영국의 후원 아래 1990년대부터 버마 민주화 운동가로 유명세를 타면서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것은 1973년 노벨상 평화상 수상을 거절한 베트남전쟁의 종결협상가인 레둑토(Lê Ðức Thọ)가 평화에 더 많은 기여를 했고,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싸르트르(Jean P. Sartre)가 수상자들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작가이기 때문에 수상 여부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일은 못 된다.

여하튼 미얀마 국군은 2011년 민정이양 후에도 헌법상 의회의 4분의 1 의석을 국군에 할당하고 정부 내 가장 유력한 부처를 지배하는 권한을 보장하여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한다.

2015년 11월 8일, 총선거에서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압승했다. NLD는 당수 아웅산수치의 대통령 취임을 요구했지만, 미얀마연방공화국헌법 규정에는 외국인 배우자와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어서 영국 국적의 아들(영국인 남편은 1999년 사망)이 있는 아웅산수치 대신에 수치의 측근으로 랭군영어고등학교 동창이며 측근인 흐틴초(Htin Kyaw)를 대통령으로 옹립해 2016년 3월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새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웅산 수치는 국가고문, 외무장관, 대통령부 장관을 겸임하여 새 정부는 ‘사실상 수치정권’이 되었다.

아웅산수치 자신도 신임 초 대통령은 아무런 권한이 없는 괴뢰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천명했다. 새 정권은 아웅산 수치가 외무장관 겸 대통령부 장관, 심지어 신설한 ‘국가 고문’을 맡아 정권의 실권을 장악하는 체제를 갖췄다. 국가고문은 대통령에게 정치적 ‘통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아웅산수치의 ‘통보’는 사실상 대통령의 ‘지시’가 되었다.

2020년 11월 총선에서 수치가 이끄는 NLD가 개선 476의석의 80%를 넘는 396석을 획득, 미얀마 국군계의 최대야당인 연방단결발전당(USDP)은 33석에 그쳤다. 미얀마 국군은 이슬람 계 소수민족인 로힝야 족의 학살을 군부 책임으로 떠넘기고 소수민족 지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는 등, 부정선거 문제를 제기했다.

o   부정선거 여부에 관한 양측의 주장

아웅산 수치 정권의 최대 과제인 소수민족 반군과의 평화협상에 진전이 없어서 여당인 국민민주연맹(NLD)의 고전도 예상과 달리 이번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대유행하고 있는 동안에 실시되기 때문에 국군 계의 야당인 연방단결발전당(USDP)에서는 국민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거 연기를 주장했고 가두연설을 제한한 것이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서부 라카인 주에 사는 많은 로힝야 족은 불법이민자로 규정되어 선거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소수민족 정당이 지배하는 일부지역의 투표가 치안상의 문제를 이유로 취소됐기 때문에 100만 명 이상의 국민이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국제사회는 총선 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평가도 있는 반면, 자의적인 득표를 비판하는 등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국군과 USDP는 총선에 부정이 있었다고 항의하고, 군부 지지자들은 선거의 조사를 요구하는 가운데 군은 1월 26일 쿠데타를 암시하여 긴장이 고조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발표했으며, 유엔과 미국, EU는 선거결과의 존중을 미얀마 군에 호소했다.

1월 28일에는 정부와 군 사이에 사태 수습을 위한 회합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군은 투표의 재검표와 국회 개원 연기를 요구했지만 정부 측이 거부했다. 의회 개회 전날인 1월 31일 총선에서 1,050만 건 이상의 부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며 총선 후 첫 의회가 2021년 2월 1일에 개회하는 것에 반대했다.

미얀마 헌법 개정은 상하 양원의 의석의 4 분의 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지만, 양원의 25%를 군 지명의원으로 하는 규정이 있어서 2020년 3월 의회에서 NLD가 제출한 국군의 영향을 약화하는 헌법개정안의 대부분이 군인 의원의 반대로 좌절된 적이 있다.

o    대화 불응과 쿠데타 발발

총선 후 첫 의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2021년 2월 1일 새벽, 미얀마 국군은 윈 민트(Win Myint. 1951년생. 대통령 취임 2018년 3월), 아웅산수치 국가고문, NLD 간부, NLD 출신의 지방정부 수장 등 45명 이상을 연금 또는 구속했다. 윈 민트 대통령과 아웅산수치 국가고문은 수도 네피도에 있는 각자의 자택에 연금되었다. 아웅산수치의 개인저택은 양곤의 미드타운에 있다. 군부는 민 아웅 라잉(Min Aung Hlaing. 1956년생) 국군총사령관이 전권을 장악했다.

쿠데타 직후에 군부는 합법적 절차대로 군 출신의 민트쉐(Myint Swe. 1951년생) 제1부통령이 임시대통령으로 헌법 417조의 규정에 따라 1년을 기한으로 하는 비상사태 선언을 발표하고 국군이 정권을 장악했음을 선언했다.

민 아웅 라잉 국군 총사령관은 군 간부 16명으로 2월 2일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위임 받은 국가행정위원회(State Administrative Council)를 설치하고 그 장인 국가행정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SAC의장은 곧 민트 정권의 각료 24명 전원을 해임하고, 새로 11명의 각료를 임명했다. 새 각료는 국군계 정당의 연방단결발전당(USDP)의 주도로 2011년에 구 군정 하에서 출범한 Thein Sein 정권 전직 각료의 등용이 눈에 띈다.

o   쿠데타 발발 후의 정세

쿠데타 발생 직후 국영방송인 미얀마 라디오TV방송(Myanmar Radio and Television. MRTV)는 TV와 라디오방송이 중지됐다고 밝혔다. 또한 인터넷과 전화가 불통되고, 최대도시 양곤 등 연락이 두절되었다.

은행창구에는 많은 국민이 계좌에서 현금 인출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에, 일부 은행은 창구업무를 중지했고, 양곤증권거래소는 네트워크의 불통을 이유로 하루 거래를 정지했다.

쿠데타가 발생한 2021년 2월 1일 자택에 연금된 아웅산 수치는 페이스 북의 NLD 선거 계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쿠데타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라고 호소했다. 연방의회의 일부 의원은 2월 5일 의회 대표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정권에 저항을 시도했다.

2월 11일 쿠데타를 용인하는 중국에 대한 항의 시위로서 수백 명의 시위대가 양곤 시내의 중국대사관 앞에 모여 ‘미얀마를 지지하라. 독재자를 지지하지 말라’고 중국어와 영어로 쓰여진 플래카드를 들었다.

o   해외의 반응

태국과 일본 도쿄 등지에서 항의 데모가 열렸다. 일본에서는 1,000명이 넘는 재일 미얀마 인이 일본 도쿄의 유엔대학 앞에 집결해, 쿠데타에 항의했다.

미국, 유럽, 일본, 인도, 국제연합, EU에서 아웅산 수치 등의 석방과 민정 복귀를 요구하는 비판이 일고 있다. 특히 미국정부는 제재의 부활을 모색하고 있지만, 미군과 미얀마 군 사이의 교류는 거의 없기 때문에 제재의 효과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의 공식 반응도 발표되었다.
• 유엔 – António Manuel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아웅산수치 등의 신병 구속을 강하게 비난하고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 총선결과를 존중하고, 민주화 과정을 회복하도록 주장했다.
• 미국 – Antony J. Blinken 국무장관은 전원을 석방하도록 요구했고 Psaki 백악관 대변인은 선거결과를 바꾸려는 시도와 미얀마 민주화 이행을 방해하는 움직임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표명했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동안 민주화에 대한 대가로 해제해 왔던 제재의 부활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 영국 – Alexander Johnson 수상은 쿠데타와 아웅산수치들을 부당하게 구속한 것을 비난하고 총선 결과를 존중하라고 주장했다.
• 유럽연합 – Charles Michel(프랑스) 유럽이사회 의장과 Ursula Leyen(독일) 유럽위원장은 쿠데타를 비난하고 구속된 인사를 즉각 석방과 선거결과를 존중하도록 요구했다.
• 호주 – Marise Payne 외무장관은 미얀마 국군에게 법치주의의 존중과 법적 수단에 의한 분쟁의 해결, 불법으로 구속된 전원을 즉시 석방하도록 요구했다.
• 중국 – 외교부 왕문빈(汪文斌) 부보도국장은 헌법에 따라 의견 차이를 극복하고 정치와 사회의 안정이 지켜지기를 희망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쿠데타 자체는 비난하지 않고, 중국은 미얀마의 우호적인 이웃 나라라고 밝혔다.
• 일본 –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당사자 간의 평화적인 해결을 요청했고 현지 대사관을 통해 미얀마 체류 일본인에게 주의를 환기했으며 모데기 도시미쓰(茂木敏充)외상은 민주화 프로세스가 손상되는 것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o   맺음

영국이 과거의 식민지를 영연방으로 묶어 국제보조를 취해왔지만 미얀마는 영연방에서 독립된 주권국가이다. 남아시아로 뻗어 내려간 몽골로이드인 버마족이 60%를 차지하는 미얀마를 그 영향권 아래 두려는 영국의 시도는 전후 70-80년간이나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는 버마 국가가 성립한 후에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개석 군대의 행패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서북에는 중국계 소수민족이, 동부에는 인도계, 남부에는 태국계 소수민족이 국가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영미를 비롯한 유럽 제국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비교적 양국 관계가 우호적인 상태를 깨뜨리기 위해 대중적 지명도가 높으나 그리 명석하지 못한 아웅산수치를 민주화 운동가로 추켜세워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배태된 민족 내부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한 미얀마 군부의 노력과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더 잘 살기를 원하는 미얀마 국민들의 희망이 통일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아직도 한번 넓힌 오지랖을 조일 줄 모르는 서방 국가들에서 식자들의 각성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유일상(건국대 명예교수. 저널리즘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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