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04년 2월 말에 주류 언론의 왜곡된 정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장 베르뜨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미군에 의해 납치·추방당한 2월 29일에 완성·출판되었습니다.
15년 뒤인 오늘날에도 우리는 아이티 민중과 연대합니다.
이 기사는 이후에 『전쟁의 세계화: 미국의 인류와의 긴 전쟁』의 한 장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미셸 초서도브스키, Global Research, 2021.02.28.
기사번역: 4.27시대연구원 편집기획위원 안광획
이중 잣대
백악관은 아이티 대통령 장 베르뜨랑 아리스티드의 ‘자국 통치 연장의 적합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아리스티드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떠나기 전날 발표된 백악관 공식 성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주의적 원칙을 고수하지 못한 그의 실패는 오늘날 아이티에서의 극심한 양극화와 폭력적 불안을 야기하였다… 그의 행동은 아이티 통치 연장의 적합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그에게 입장을 주의 깊게 검토하고, 책임을 질 것과, 아이티 인민들을 위한 최선의 행동을 하길 촉구하는 바이다.”
이제 우리는 미국인민들에게 거짓말하고, 국제법을 위반하고, 조작된 구실을 명분으로 범죄적 전쟁을 일으킨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겐 왜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안 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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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29일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퇴진시키기 위한 무장봉기는 신중히 준비된 군사정보작전에 의한 것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준군사조직은 2월 초에 도미니카 공화국 국경을 넘었습니다. 잘 무장되고 훈련받았으며 좋은 장비를 갖춘 준군사조직 대원들은 ‘아이티 전진과 진보를 위한 전선’(Le Front pour l’avancement et le progrès d’Haiti(이하 아이티 진보전선))의 전前 구성원으로, 대규모 민간인 학살과 정치인 암살에 관여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1991년 군사쿠데타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 베르뜨랑 아리스타드 정부를 축출시켰습니다.
자칭 ‘민족해방재건전선(Front pour la Libération et la reconstruction nationale (FLRN))’은 아이티군 출신이자 전 경찰청장인 가이 필리프가 이끕니다. 필리프는 1991년 쿠데타 당시 에콰도르에서 미군 특전사와 12명의 다른 아이티군 장교들로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후안 곤잘레스, 『뉴욕 데일리 뉴스』, 2004.02.24. 참조.)
고나이브와 카프 아이시앵 공격을 주도한 가이 필리프의 동료이자 또 다른 두 반란군 지휘관은 ‘토토’라 불리는 에마누엘 콩스탕뜨와 전前 통통 마꾸(Tonton Macout: 1959년 창설된 아이티 준군사조직) 소속으로 아이티 진보전선의 지도자인 루이스–요델 샹 블랭입니다.
1994년, 에마누엘 콩스탕뜨는 아이티 진보전선 암살부대를 이끌고 라보또의 한 마을에서 훗날 ‘라보또 대학살’이라 불릴 사건을 자행하였습니다.
“1995년 4월 수도(포르또 프랭스)에서 북쪽으로 161km 떨어진 해변 하층민 거주지역인 라보또에서 마지막으로 악명 높은 대학살이 벌어졌다. 라보또에는 6,000여 명 주민 대부분이 어부나 소금 제조업에 종사하지만, 정치적 반체제 인사들이 은신해 있는 야권의 주요 거점으로도 유명하다… 1994년 4월 18일, 100명의 군인과 30개의 준군사조직 부대원들이 ‘드레스 리허설’이라 불리게 될 조사를 실행하고자 라보또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라보또에 은신해 있던 아미오 ‘쿠바인’ 메타이에 (아리스타드의 지지자로 잘 알려짐)를 색출하고자 거주지역에서 주민들을 고문하였다. 그들은 주민들을 폭행하고 임신한 여성을 유산시켰으며, 하수구를 열어 하수구 물을 마시도록 강요하였다. 군인들은 65세의 시각장애인이 피를 토할 때까지 고문하였다. 노인은 다음날 사망했다.
군인들은 4월 22일 새벽 전에 되돌아왔다. 그들은 주택들을 뒤지고 거리에서 주민들에게 총을 쏘았으며, 주민들이 물가로 도망쳤을 때 다른 군인들은 지휘받은 대로 배에서 그들에게 사격했다. 수일 동안 시신은 해안에 방치되었다: 일부는 실종되어 신원을 찾을 수 없었다. 희생자의 수는 20~30 명가량으로 추정되며, 수백 명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마을을 떠났다.”(『세인트 피터스버그 타임즈』, 플로리다, 2002.09.01.)
군사정부 기간(1991~1994), 아이티 진보전선은 (비공식적으로) 총사령관 라울 세드라스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의 관할 하에 있었습니다. 1996년 UN 인권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티 진보전선은 CIA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군사독재 하에, 마약거래는 CIA의 지원을 받는 군사협정으로 보호받았습니다. 아이티 진보전선 준군사조직 지휘관들이 포함된 1991년 쿠데타 지도자들은 CIA의 급여를 받았습니다.(파울 데리엔조; 짐 로브, IPS, 1996.10.11. 참조.) 에마누엘 콩스탕뜨의 별칭인 ‘토토’에게 CIA로부터 월급 700$를 받았으며 그동안 토토는 아이티 진보전선을 조직했다는 사실이 1995년 CBS의 ‘60 Minutes’ 프로그램에서 밝혀졌습니다. (『마이애미 뉴 타임즈』, 2004.02.26.)
민간 ‘야당’(실제로는 관제야당)
‘민주연합(DC)’이라 불리는 200여개의 정치조직의 연합체는 에방스 폴 포르또 프랭스 전 시장이 이끌었습니다. ‘민주연합(DC)’은 184개 시민사회단체(G-184)와 함께 ‘시민사회단체 및 야당 민주 플랫폼’을 구성하였습니다.
184개 단체는 미국 출신 아이티계 미국시민인 앙드레 (앤디) 아뻬드가 주도하였습니다. 앤디 아뻬드는 뒤발리에 시대에 설립된 아이티 최대 저임금 노동력 수출 조립라인인 알파 인더스트리를 소유합니다. 그의 작업장 공장에서는 섬유 제품을 생산하며, 스페리/유니시스, IBM, 레밍턴, 허니웰 등 다양한 미국 회사의 전자제품을 조립합니다. 아뻬드는 약 4,000명의 노동력을 보유한 아이티 최대의 고용주입니다. 앤디 아뻬드 공장의 임금은 하루당 68센트로 낮습니다. (『마이애미 타임즈』, 2004.02.26.) 현재 최저임금은 하루당 1.5$입니다.
“케이티 리 지포드가 작업장 공정 스캔들을 폭로한 미국의 전국 노동위원회는 수 년 전 아이티 자유무역지대 소재 아뻬드의 공장에서 종종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이 지급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주당 78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다고 보도했다.”
(『데일리 뉴스』, 뉴욕, 2004.02.24.)
아뻬드는 1991년 군사쿠데타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였습니다. 민주연합과 G-184는 모두 가이 필리프가 이끄는 FLRN (전 아이티 진보전선 죽음의 부대)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FLRN은 아이티 산업체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민간 ‘야당’과 비폭력적이라 주장하는 FLRN 준군사조직 간에는 완벽한 구분이 없습니다. FLRN은 이른바 ‘민주 플랫폼’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기금(NED)의 역할
아이티에서, 이 ‘시민사회 야당’은 CIA의 손아귀에 있는 미국 민주주의기금(NED)로부터 자금조달을 받고 있습니다. 민주 플랫폼은 NED의 무기 중 하나인 국제 공화주의협회(IRI)의 지원을 받습니다. 존 메케인 상원의원은 IRI 이사회 의장입니다.(로라 플린·삐에르 라보셰르·로버트 로스, 『헤드라인에서 은폐된 진실: 미국의 대(對) 아이티 전쟁, 캘리포니아 기반 아이티 운동 위원회(HAC)』 참조.)
G-184의 지도자 앤디 아뻬드는 콜린 파월 주지사와 2월 29일 미군을 통해 아리스타드 대통령을 납치하고 추방시킬 데 대한 문제에 대해 수 일 간 연락하였습니다. IRI의 지원을 받는 엘리트 사업 조직과 종교 NGO로 구성된 그의 포괄 조직은 유럽연합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자금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링크 참조.)
비록 공식적으로는 CIA의 일부는 아니지만, NED(해외에서는 IRI)가 민간 정당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NED는 CIA가 정치인에게 은밀하게 뇌물을 상납하고 가짜 시민사회 전선조직을 설립한 혐의로 기소된 1983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NED 설립의 책임을 맡은 알렌 바인슈타인에 따르면 “오늘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은 25년 전 CIA에 의해 은밀히 수행되었습니다.”(『워싱턴포스트』, 1991.09.21.)
NED 의회기금을 국제 공화주의협회(IRI), 전국 민주주의협회(NDI), 국제 민간기업 센터(CIPE), 국제 노동연대 미국 센터(ACILS) 4개의 기구에 전달합니다. 이 기구들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자들에게 기술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자격을 갖췄다”라고 주장합니다.(IRI 참조.)
즉, CIA와 NED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습니다. CIA가 무장한 준군사조직 반란군과 죽음의 부대에 지원할 때, NED와 4개 구성조직은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민간’ 정당과 시민단체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NED는 CIA의 ‘민간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CIA-NED의 세계의 여러 지역의 개입은 여러 국가에서 적용되는 일관된 형태를 특징으로 합니다. NED는 베네수엘라의 ‘시민사회’에 자금을 제공하고 대통령 우고 차베스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의 ‘민주 협회’는 NED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이티에서는 ‘민주연합’과 G-184가 그러합니다.
비슷하게도,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CIA가 유고슬라비아 군경에 테러공격을 감행한 준군사조직인 코소보 해방군(KLA, 1995년 창설)을 지원했습니다. 더군다나, NED는 CIPE를 통하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야당연합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NED는 2000년 대선에서 ‘자유시장’ 개혁 플랫폼을 공식화(IMF와 연계)한 야권 경제학자 그룹인 G-17에 자금을 지원했고, 그 결과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는 몰락했습니다.
IMF의 고통스러운 ‘경제 처방’
IMF와 세계은행은 경제·정치 재설정 과정의 핵심입니다. 비록 정부 간 국제기구의 협력 하에 수행되지만, IMF의 개혁은 미국의 전략과 외교정책 목표를 전적으로 따릅니다.
‘워싱턴 합의’를 바탕으로 한 IMF의 긴축재정과 파괴적 충격을 통한 구조조정 조치는 종종 사회적·민족적 분쟁을 일으킵니다. IMF의 개혁은 종종 선출된 정부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혼란 사례로, IMF의 고통스러운 경제처방은 소말리아, 르완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와 같이 전 국가의 불안정화를 일으켰습니다.(미셸 초서도브스키, 『빈곤의 세계화: 새로운 세계질서』 제2판, 2003 참조.)

IMF의 프로그램은 경제혼란의 일관된 도구입니다. IMF의 개혁은 과감한 긴축 조치를 통하여 국가기관을 재편하고 축소하는 데 기여합니다. 후자는 반군 준군사조직과 야당을 지원하는 CIA의 은밀한 활동을 포함한 다른 형태의 정치적 간섭 및 개입과 함께 실현됩니다. 게다가, 이른바 ‘긴급 복구’와 ‘분쟁 후’ 개혁은 종종 내전, 정권교체, 국가비상사태의 여파로 IMF의 지침에 따라 도입됩니다.
아이티에서는 IMF는 뒤발리에 시대에서 빠져나온 직후에 ‘자유시장’ 개혁을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1990년 첫 대선에서 아리스티드의 선출 이래로 몇 개 단계를 적용하였습니다. 1991년 장 베르뜨랑 아리스티드 취임 8개월 뒤에 벌어진 군사쿠데타는 아리스티드의 진보적 개혁을 뒤엎고 뒤발리에 시기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다시 적용했습니다.
전 세계은행 총재 마크 바진은 1992년 6월 군사정권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었습니다. 사실, 미 국무부가 그의 임명을 요청했는데, 바진은 ‘워싱턴 합의’를 위해 일한 경력이 있습니다. 1983년, 그는 뒤발리에 정권 하에서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IMF로부터 재무 포트폴리오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장 끌로드 뒤발리에께서는 IMF 후보자이자 전 세계은행 총재인 마크 바진의 재무부 장관 임명을 수락하셨습니다.”(『Mining Annual Review』, 1983.06.) 워싱턴에서 ‘선호했던’ 바진은 이후 1990년 대선에서 아리스티드와 경쟁했습니다.
바진은 1992년에 군사정권에 의해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바진 총리 재임기간 동안, CIA의 지원을 받은 아이티 진보전선 죽음의 부대에 의한 정치적 학살과 사법살인이 허용되어 4,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약 30만 명의 인민이 난민이 되었습니다. “수 천 명이 도미니카 공화국 국경을 넘어 탈출했고 6만 명 이상이 공해로 탈출했습니다.”(디나 폴 팍스, 아이티 인권협회 이사장의 성명서, 미 상원 의회, 워싱턴 D.C., 2002.12.01.) 게다가, CIA는 아리스티드가 ‘정신적으로 불안하다’는 식의 비방 캠페인을 시작하였습니다. (『보스턴 글러브』, 1994.09.21.)
1994년 미국의 군사개입
군정 3년을 통하여, 미국은 1994년에 2만 명가량의 점령군과 ‘평화유지단’을 보내는 것으로 아이티에 개입하였습니다. 미군의 개입은 민주주의 회복과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였습니다: 군사정권과 신자유주의자 집단에 항거하는 민중봉기를 막기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즉, 미군의 점령은 (군사정권의) 정치적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현되었습나다. 군사정권 인사들이 망명하는 동안, 헌정 정부로의 회귀에는 IMF의 강제 조항(diktats)을 준수해야 했으며, 신자유주의 의제에 대한 진보적 ‘대안’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배제 되었습니다. 게다가, 미군은 1999년까지 국내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이티 군대는 해산되었고, 미 국무부는 아이티 경찰(HNP)의 구조조정에 ‘기술적 조언’을 제공하기 위하여 용병 기업인 다인코프를 고용 했습니다.
(참조: 아이티의 악몽: 코카인 제조업과 CIA의 협력)
“다인코프는 언제나 펜타곤(미 국방부)과 CIA의 비밀 작전을 위하여 ‘컷아웃’ 역할을 해 왔다.”(제프리 생클레어·알렉산더 칵번, 「반격」, 2002.02.27.)
아이티에서의 다인코프의 조언 하에, 통통 마꾸와 1991년 쿠데타에 연루된 아이티군 장교들이 합류했습니다.(켄 실버스타인, 「사설화된 전쟁」, 『네이션』, 1997.07.28.)
1994년 10월, 아리스티드는 망명에서 돌아와서 1996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대통령직을 다시 수행했습니다. ‘자유시장’ 개혁자들은 그의 내각에 들어갔습니다. 치명적인 거시경제 정책의 새로운 파동이 “신속한 거시경제 안정화의 달성과 공공행정의 복구, 가장 시급한 요구에 부응하려는” 이른바 ‘긴급 경제회복 계획(EERP)’에 따라 채택되었습니다. (「IMF의 아이티에 대한 3년 간 ESAF 대출 승인」, 워싱턴, 1996 참조.)
헌정정부 회복은 아이티 해외 채권자들과 비공개로 협상 되었습니다.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직에 복귀하기 전에, 새 정부는 해외 채권자들과 함께 국내부채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세계은행, 미주 개발은행(IDB), IMF가 제공한 새로운 대출은 국제 채권자에 대한 아이티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새 돈은 오래된 부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되어 대외부채는 급증하였습니다.
군정 기간 동안에, 국내총생산(GDP)는 30% 감소 하였습니다.(1992~1994) 그리고 1인당 소득이 250$인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이자 세계 최빈국 중 하나입니다.(세계은행, 『아이티: 빈곤 감소의 도전』, 워싱턴, 1998.08. 참조.) 세계은행은 아이티의 실업률을 60% 정도로 추정합니다.
(2000년 미국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티의 실업률은 80%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미 하원 형사 사법 마약 정책 및 인적 자원 소위원회, 『FDHC 보고서』, 2000.04.12. 참조.)
3년간의 군정과 경제 침체의 여파로, IMF 차관협정에서 구상한 ‘긴급 경제복구’는 없었고, 실제로는 정 반대였습니다: IMF는 ‘회복’ 프로그램에 따라 ‘안정화’를 강요했으며,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회보장제도 관련 예산을 삭감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공무원 수 감축과 더불어 ‘잉여’부서 직원을 해고하는 공무원 구조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IMF-세계은행의 합작은 부분적으로 공공서비스를 마비시켰고, 결국 국가체제 자체를 파멸시켰습니다. 보건·교육 서비스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서, IMF는 예산적자 해결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잉여’교사 및 보건 종사자들의 해고를 요구했습니다.
워싱턴의 외교 정책 계획은 IMF의 치명적인 경제 처방 적용과 함께 시행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그야말로 사회경제적 재앙에 직면했습니다.
아이티 농업의 운명
아이티 인구의 75% 이상이 국내시장을 위한 식량작물과 수출을 위한 특용작물 모두를 생산하는 농업에 종사합니다. 이미 뒤발리에 시기에, 농업경제는 침체 되었습니다. IMF-세계은행 지원 하의 무역개혁의 적용을 통하여, 지역시장을 위한 식량 생산을 맡던 농업체계는 불안해 졌습니다. 무역장벽이 해제됨에 따라 지역시장은 미국산 농산물(쌀, 설탕, 옥수수 등)의 물량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전체 농업경제를 파멸시켰습니다. 대규모 논이 조성된 아이티의 주요 곡창 지대였던 고나이브는 파산했습니다.
“1990년 말에 아이티의 국내 쌀 생산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그리고 미국발 쌀 수입은 현지 쌀 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국내 농업 인구는 초토화되었으며, 쌀값은 폭등했다.” (롭 라이언, 「아이티–자본주의에는 답이 없다!」, 『Socialist Appeal』, 2004.02.24. 참조.)
수년간의 결과로, 카리브해의 작은 빈국인 아이티는 일본, 멕시코, 캐나다에 이어서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미국쌀 수입국가로 전락했습니다.
IMF 개혁의 두 번째 충격
2000년 11월 23일에 대선이 예정되었습니다. 2000년에 클린턴 행정부는 아이티 개발 원조와 관련하여 엠바고를 걸었습니다. 선거 2주 전에 퇴임하는 행정부는 IMF와 양해 각서를 채결했습니다. IMF와의 협정은 신자유주의 의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처음부터 배제했고, 이는 완벽한 시점에 진행되었습니다.
재무부는 12월 14일에 의회에 예산안 수정안을 보냈습니다. 기부자 지원은 입법부 도장의 승인을 조건으로 하였습니다. 아리스티드가 최저임금 인상, 학교건설과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새 정부의 손은 묶여 있었습니다. 국가예산, 공공부문 관리, 공적투자, 민영화, 무역 및 통화정책 등 모든 주요 결정은 이미 취해져 있었습니다. 이는 2000년 11월 6일에 체결된 IMF와의 합의의 일부였습니다.
2003년에, IMF는 이른바 ‘유가 효율화 체계’를 적용하여 인플레이션을 일으켰습니다. 통화 가치는 폭락했습니다. 유가는 2003년 1~2월 동안 130%로 급등했습니다. 이는 IMF 경제개혁 실행을 지원했던 아리스티드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증가시켰습니다.
유가 인상은 2002~2003년 소비자 물가(CPI)를 40% 급등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아이티–경제 및 금융 정책 양해각서』 및 『기술 양해각서』, 포르또 프랭스, 아이티, 2003.06.10. 참조.) 결국, IMF는 생계비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인플레 압력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임금 동결을 강요했습니다.(교사 및 보건 종사자 봉급 역시 포함) IMF는 또한 시간 당 25센트의 법정 최저임금을 단계적으로 폐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IMF에 따르면, 최저임금 삭감을 의미하는 “노동시장 유연화”는 해외 투자자 유치에 기여할 것이라고 합니다. 1994년 3$였던 일일 최저임금은 2004년에 1.5~1.75$(아이티 그루드–달러 간 환율에 따라 다름)로 삭감 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래로 IMF-세계은행의 “저렴한 노동력” 정책의 한 부분이었던 아이티의 ‘기가 찰 정도’로 낮은 임금은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수단이란 주장과는 완전히 뒤틀린 논리입니다.
즉, 조립산업(완전히 자율화된 노동시장)에서의 작업장과 아이티의 플랜테이션 농업에서의 강요된 노동조건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때문에” IMF에게 경제번영을 이룩하는 수단으로 포장됐습니다.
아이티는 급증하는 해외부채에 시달렸습니다. 심히 아이러니하게도, IMF-세계은행이 후원한 사회 부문의 긴축조치는 인구 1만 명 당 1~2명의 의사가 담당하고 인구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아이티에서 시행되었습니다. 뒤발리에 시기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 사회 서비스는 (이 때문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IMF 협정의 결과는 추가적으로 구매력을 파탄시켰고, 이는 중산층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에다가, 금리는 급등했습니다. 아이티의 북동부 지역에서는 유가 폭등으로 교통 및 수도·전기 등의 공공서비스가 사실상 마비 되었습니다.
인도주의적 재앙이 도래하는 동안, IMF가 야기한 경제파탄은 아리스타드를 “경제 무능”으로 비난했던 민주적 플랫폼의 인기를 높이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실제로 작업장을 소유한) 앤디 아뻬드를 포함한 민주 플랫폼의 지도자들은 저임금 경제의 주역입니다.
코소보 모델의 적용
2003년 2월, 워싱턴은 제임스 폴리를 아이티 대사로 임명하였습니다. 폴리는 코소보 전쟁 기간 클린턴 행정부 하의 국무부 대변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브뤼셀의 NATO 본부에서 근무하였다. 폴리는 CIA가 후원한 작전에 앞서 포르또 프랭스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2003년 9월 UN 유럽 사무소의 부국장을 역임했던 제네바의 저명한 외교관에서 포르또 프랭스로 옮겨 갔습니다.
폴리 대사가 199년에 코소보 해방군(KLA) 지원에 참여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코소보 해방군(KLA)는 마약 매매로 자금을 충당했으며 CIA의 지원을 받았습니다.(미셸 초서도브스키, 「조직된 범죄로 자금지원 받는 코소보 자유투사들」, 『Covert Action Quaterly』, 1999 참조.)
KLA는 1999년 NATO 침략과 그 여파로 이어지는 수개월 동안 정치인 암살 및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NATO의 코소보 침략과 점령 이후로, KLA는 UN의 후원 아래 코소보 방위군(KPF)으로 바뀌었습니다.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무장해제된 것이 아니라, 조직적 범죄와 발칸반도 마약거래에 연루된 테러집단에 상당한 정치적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코소보 전쟁 당시, 현 아이티 대사 제임스 폴리는 국무부 브리핑을 담당했으며 브뤼셀에서 NATO의 제이미 시어와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1999년 3월 24일 NATO의 공격으로 전쟁이 터지기 전에, 제임스 폴리는 KLA를 이른바 존경할만한 정치조직으로 ‘전환’시킬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KLA를 스스로 정치적 지향을 가진 조직으로 변모시키게 하여 KLA와의 좋은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고 그들이 변혁 노력에서 우리가 그들을 돕길 바란다면, 아무도 우리와 논쟁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뉴욕 타임즈』 1999.02.02. 기사)
침략의 여파로, “KLA와 민주연맹운동(LBD)로 구성된 자칭 ‘코소바르 행정부’는 루고바 민주연맹(LDK)에 반대하는 5개 야당연합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여기에, 총리직 외에도 KLA는 재무부, 공공치안, 국방부를 통제했습니다.” (미셸 초서도브스키, 『NATO의 유고슬라비아 침략전쟁』, 1999)
폴리의 성명으로 전달된 미국 국무부의 입장은 KLA가 “군대로서는 계속할 수는 없으나, ‘다른 맥락’에서 자치에 대한 탐구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었습니다. 이는 NATO의 보호 하의 ‘마약 민주주의’를 뜻합니다.(위 참고문헌 재인용)
마약거래와 관련하여, 코소보와 알바니아는 아이티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들은 이란–터키 황금 초승달 지대에서 서유럽으로의 마약 환적과정에서 ‘허브’ 역할을 합니다. CIA·독일 연방 정보국·NATO의 지원 하에, KLA는 알바니아 마피아 및 범죄 조직과 무역 거래 관계를 맺었습니다.(미셸 초서도브스키, 「조직된 범죄로 자금지원 받는 코소보 자유투사들」, 『Covert Action Quaterly』, 1999 참조.)
코소보의 모델은 현 아이티의 미국 대사인 제임스 폴리가 공식화한 아이티의 모델인가?
CIA와 국무부는 코소보에서의 KLA와 하심 타치의 경우와 같이 아이티의 가이 필리프와 FLRN를 지원합니다. 즉, 워싱턴의 계획은 ‘정권 교체’라 할 수 있습니다: 라발라 행정부(주: 아리스티드 민주정권)를 전복시키고 민주 플랫폼 및 전 아이티 진보전선 지도자들과 통통 마꾸 테러리스트로 구성된 자칭 ‘아이티 진보전선’(FLRN)으로 구성된 미국의 괴뢰정권을 설치합니다. 후자는 앤디 아뻬드가 이끄는 민주연합과 184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전국 통일정부’를 구성할 예정입니다. 여기에다가, 가이 필리프가 이끄는 FLRN은 1995년 해산된 아이티군의 재건을 맡습니다.
위태로운 것은 다양한 야권단체와 CIA의 지원을 받는 반란군 간의 궁극적인 권력공유 합의인데, 이는 콜롬비아에서 아이티를 거쳐 플로리다로 이어지는 코카인 운송거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무역의 보호는 미국의 이익에 기여할 새로운 ‘마약정부’의 형성을 뜻합니다.
2000년에 코소보의 KLA에서 발생한 것과 같이, 반군에 대한 (상징적인) 가짜 군축은 국제 감독 하에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전직 테러리스트’는 민간 경찰에 통합되거나 미국 감독 하의 아이티군의 재건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시나리오가 보여주는 것은 뒤발리에 시기 테러리스트 조직이 복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티드 및 라발라 지지자를 대상으로 한 민간인 학살 및 정치적 암살은 이미 지하에서 실행 중입니다.
즉, 워싱턴이 진정 인도주의를 내세운다면, 왜 아이티 진보전선 죽음의 부대를 지원하고 자금을 조달합니까? 그 목적은 민간인 학살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CIA가 주도한 작전(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엘살바도르)을 모델로 한 FLRN 죽음의 부대는 고삐 풀렸고,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을 정치적으로 암살하고 있습니다.
마약 환적 무역
IMF 개혁 하에 실물경제가 파산하는 동안, 마약 환적무역은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미국 마약 단속국(DEA)에 따르면, 아이티는 “전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주요 마약환적 국가로, 대량의 코카인을 콜롬비아에서 미국으로 공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미 하원 형사 사법·마약정책 및 인사 소위원회, 『FDHC 보고서』, 2000.04.12. 참조.)
아이티는 현재 미국으로 들어가는 코카인의 14%를 담당하며, 이는 막대한 양의 검은돈을 세탁하는 조직적 범죄와 미국 금융기관의 수십억 $의 수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약 국제거래는 약 5천억 $ 규모로 추산됩니다. 마이애미 직행 환적 무역 외에도, 검은돈은 부동산이나 기타 관련활동 등 ‘진정한 투자’로 재활용됩니다.
CIA가 뒤발리에 시기와 군사독재 시기(1991~1994)의 이 무역을 보호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87년 상원 외교위원회 마약·테러 및 국제 작전 소위원회 의장인 상원의원 존 케리는 무장반군에 대한 자금지원을 위한 마약자금세탁을 포함하여 CIA과 마약거래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맡은 주요 조사를 맡았습니다. 1989년에 출판된 『케리 보고서』는 니카라과 반군 자금조달에 집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이티와 관련한 부분 역시 포함합니다:
“케리는 1988년 마이애미에서 장 폴 중령을 기소한 아이티 군사정권 관계자들의 마약 밀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발전시켰다. 특히, 폴 대령은 미국 당국에 항복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아이티 군사정권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1989년 11월, 폴 중령은 전통적인 아이티의 선물인 호박 수프를 먹은 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 상원은 1988년 당시 내무장관 윌리엄스 레갈라 장군과 그의 DEA 연락관이 코카인 선적을 보호하고 감독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증언은 당시 아이티군 사령관 앙리 낭피가 1980년대 중반에 상륙권에 대한 대가로 콜롬비아 인신매매범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는 데 일조했다.
1989년에 또다른 군사쿠데타로 프로스페 아브릴 중장이 권력을 잡았다…. 존 케리 상원 의원의 소위원회에서의 증언에 따르면, 아브릴은 사실 코카인 무역과 교통요지로서의 아이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폴 데리엔조, 『아이티의 악몽: 코카인 쿠데타-CIA 유착관계』, 1990 봄)
케리의 특별 보좌관인 잭 블럼은 미 의회 선정위원회에 제출한 1995년 성명에서 미국 관리들의 마약밀매와 니카라과 반군 전쟁의 공모를 지적합니다:
“…아이티에서… 아이티군의 정보 ‘원천’은 그들을 마약 카르텔 시설로 넘겼다. 부패한 군부에 압력을 가하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옹호했다. 우리는 그들의 미국 내 범죄자 친구들이 마이애미, 필라델피아, 뉴욕에서 코카인을 배포할 때 이를 외면했다. (Held our noses and kooked the other way)”(링크 참조)
아이티는 단순한 코카인 무역의 환적 허브에 그치지 않고, 1980년대 이래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현재 위기는 마약거래에서의 아이티의 역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워싱턴은 콜롬비아–아이티–플로리다로 이어지는 마약 환적경로를 보호할 친미 괴뢰정권을 원합니다. 여전히 아이티의 주요 외화수익 원천인 마약자금의 유입은 아이티의 대외부채를 충당하는 데 사용되어 해외 채권자들의 이익에도 기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당국의 마약거래 단속에 대한 공약에도 불구하고) IMF가 부과한 외환시장의 자유화는 마약자금을 세탁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을 제공했습니다. 해외 거주 아이티인의 진정한 ‘송금’과 더불어, 마약자금의 유입은 상업은행 체계에 유입되어 현지 통화로 교환됩니다. 이와 같은 외환수익의 유입은 부채상환 의무를 충족하는 재원으로 재활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수익성 높은 밀수품의 총 외환수익에서 아이티는 고작 적은 수익밖에 얻지 못합니다. 코카인 환적거래 수익의 대부분은 마약 도·소매 거래의 범죄 중개자, 마약 거래를 보호하는 정보기관, 범죄 수익을 세탁하는 금융 및 은행기관이 차지합니다.
마약자금은 또한 수많은 해외 은행 피난처의 ‘사설은행’ 계좌로 전달됩니다.(이러한 피난처는 대규모 서방권 은행 및 금융기관에 통제됩니다.) 마약자금은 해지펀드와 주식 시장 거래 등 다양한 금융 상품에도 투자됩니다. 월 가의 주요 은행과 유럽 은행, 증권 중개회사는 마약거래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세탁합니다.
또한, 마약거래 목적의 수십억 달러 가량의 미국 달러 지폐의 인쇄를 포함한 연방준비제도의 달러 통화 공급 확대는 연방준비은행과 구성 민간은행의 이익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뉴욕의 연방준비은행입니다.(제프리 스타인버그, 「Dope, Inc. Is $600 Billion and Growing」, 『Executive Intelligence Review』, 2001.12.14. 참조.)
즉, 미국 외교정책 수립의 배후 역할을 하는 월 가의 금융기관은 아이티 환적무역을 유지하는 데 기득권을 가지고 있으며, 환적경로를 보호할 효과적인 ‘마약 민주주의’를 포르또 프랭스에 설치하려 하는 것입니다.
유로가 국제 통화로 등장한 이래로, 마약거래 상당 부분이 미국 달러보다는 유로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유로와 달러는 마약통화에서 경쟁 중입니다.
아이티를 통한 환적무역을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마약거래는 주로 미국 달러로 이뤄집니다. 국제통화로서의 미국 달러 헤게모니를 약화시키는 마약거래에서의 달러의 위축은 중동, 중앙아시아, 남유럽 마약 경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언론 조작
쿠데타 이전 수 주 동안, 언론은 FLRN 반군 역할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지 않은 채 친 아리스티드 성향 ‘무장 조폭’과 ‘암살단’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들리지 않는 침묵: FLRN의 성격에 대한 공식 성명과 UN 결의안에서 언급된 단어는 없습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UN 주재 미 대사(UN 안보리에 소속) 존 네그로폰트는 1980년대에 온두라스 미국대사 시절에 온두라스 죽음의 부대를 지원하는 핵심역할을 했습니다.(『샌프란시스코 평론』, 2001.10.20. 참조)
FLRN 반군은 극도로 잘 무장되고 훈련된 부대입니다. 아이티군은 그들이 누군지 압니다. 그들은 뒤발리에 시기의 통통 마꾸이자 전 아이티 진보전선 암살단입니다.
서방 언론은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며,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폭력성을 비난합니다. 해방군이 죽음의 부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명서의 더 넓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죽음의 부대가 CIA와 국방 정보국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뉴욕 타임즈』는 ‘비폭력적인’ 시민사회 야권이 실제로는 ‘수천 명 학살 혐의를 받은’ 죽음의 부대와 협력하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이 모든 것은 ‘우연’으로 치부합니다. 역사적 이해는 전무합니다. 누가 죽음의 부대의 지도자입니까? 언론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죽음의 부대가 ‘야당’에 속한 ‘비폭력적인’ 착한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축출하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실현한다고 합니다.
“아이티 위기가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우연히 엮인 연합전선이 등장했다. 비폭력적인 야당 운동은 수천 명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된 전 죽음의 부대 지휘관, 전 경찰청장, 그리고 지금은 아리스티드에 반기를 든 이전의 무자비한 갱단을 포함한 반군단체들과 연결되었다. 아리스티드에 대항하는 이들은 거의 통합되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가 권력에서 축출되길 바라는 열렬한 소망을 공유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 2004.02.26.)
반군 공격이나 죽음의 부대 지휘관 가이 필리프–거대 작업장 소유자이자 G-184의 지도자인 앤디 아뻬드 간의 ‘연합’에서 자연스럽거나 ‘우연한’ 것은 없습니다. 무장한 반군은 신중히 계획된 군사정보작전의 일부입니다. 도미니카 공화국군은 아이티–도미니카 공화국 동북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미니카 공화국 영토 안의 게릴라 훈련소를 발견했습니다.
(El ejército dominicano informó a Aristide sobre los entrenamientos rebeldes en la frontera, El Caribe, 2004.02.27.)
무장한 반군과 그들의 민간 ‘비폭력적’ 상대가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에 연루되었습니다. G-184 지도자인 앙드레 아뻬드는 아리스티드의 축출로 이어지는 몇 주 동안 콜린 파월과 연락을 가졌습니다. 가이 필리프와 ‘토토’ 에마누엘 콩스탕뜨는 CIA와 연결되었습니다; 반군 사령관 가이 필리프와 FLRN 정치 지도자는 미국 관리들과 연락을 가졌다는 징후가 포착되었습니다.(『BBC』, 2004.02.27. 참조.)
미국은 헌정을 수호하겠다고 거듭 언급했지만, 아리스타드를 축출하고 아이티 대통령직에 미국에 부역하는 꼭두각시를 세우는 것이 언제나 부시 행정부의 의제 중 일부였습니다.
2월 20일, 미 대사 제임스 폴리는 마이애미에 있는 미 남부 사령부에서 4명의 군사 전문가 팀을 소집했습니다. 그들의 공식임무는 ‘대사관과 그 직원에 대한 위협평가’였습니다. (『시애틀 타임즈』, 2004.02.20.) 미 특전사는 이미 아이티 내부에 있었습니다. 워싱턴은 미 해군 군함 3척이 “예방조치 차원에서 아이티로의 출격을 대기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USS 사이판(LHA-2, 강습상륙함)에는 해리어(AV-8) 수직이륙 전투기와 공격 헬리콥터가 장착되어 있습니다. 다른 두 군함은 USS 오크힐(LSD-51, 상륙정)과 USS 트렌턴(LPD-14, 강습상륙함)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캠프 르준에 주둔한 제24 해병원정대 소속 약 2,200명 규모의 미 해병대가 단기간에 아이티에 배치될 수 있다고 워싱턴은 밝혔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티드의 추방과 더불어 워싱턴은 현재 ‘전환’에서 역할을 수행할 예정인 반군 준군사조직을 무장 해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즉, 부시 행정부는 대통령의 납치와 추방에 따른 라발라와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에 대한 정치적 살해와 학살을 막지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서방 언론은 아이티 위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최소한의 분석도 하지 않았습니다. CIA의 역할은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거버넌스와 민주주의에 전념한다는 이른바 ‘국제공동체’는 미국이 지원한 준군사조직의 민간인 학살을 외면했습니다. 1990년대에 아이티 진보전선 죽음의 부대 지휘관이었던 ‘반군 지도자’는 이제 미국 언론에 의해 진정한 야권 대변인으로 지지받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 언론은 전직 대통령의 정당성은 ‘사회경제 악화’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의문을 제기합니다.
경제파탄과 사회 문제는 전적으로 1980년대 이래로 IMF가 부과한 파멸적인 경제 개혁에 따른 것입니다. 1994년 헌정복구는 의미 있는 민주주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치명적인 IMF의 경제 처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앙드레 프레발과 장 베르뜨랑 아리스타드 정부의 고위 공무원들은 실제로 IMF의 강제조항을 준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티드는 워싱턴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악마화되었습니다.
카리브 해역의 군사화
워싱턴은 모든 기능을 갖춘 민주주의 껍데기와 함께, 아이티를 미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자 합니다. 목표는 포르또 프랭스에 괴뢰정권을 세우고 아이티에 미군 영구 주둔지를 세우는 것입니다.
미 행정부는 궁극적으로 카리브 해역의 군사화를 추구합니다.
히스파니올라 섬(주: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티가 위치함)은 전략적으로 쿠바 남쪽과 베네수엘라 북서쪽 사이에 위치한 카리브 해역의 관문입니다. 미군기지 설치와 함께 히스파니올라 섬의 군사화는 쿠바와 베네수엘라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페루·볼리비아·콜롬비아의 생산지로부터 아이티를 통한 마약 환적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카리브 해역의 군사화는 다르게 말하자면 워싱턴에 의해 남미 안데스 지역에 대해 ‘콜롬비아 계획’에 따라 ‘안데스 이니셔티브’로 바꾼 것과 비슷합니다. 후자는 유정 및 가스정과 송유관 경로 및 수송통로의 군사화 기초를 다집니다. 또한, 마약거래를 보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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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미셸 초서도브스키, 『전쟁의 세계화: 미국의 인류와의 ‘긴 전쟁’』, 2015.)
원문: Michel Chossudovsky, US Sponsored Coup d’État: The Destabilization of Haiti, Global Research, 2004.02.29.(재게재 2021.02.28.)
(링크:https://www.globalresearch.ca/destabilization-haiti/5695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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