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읽기] 6. 흐루쇼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그들만의 정치
러시아 벌판, 광활한 대륙, 우리는 러시아를 부를 때 ‘대륙’이나 ‘벌판’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는다. 러시아의 총면적은 1,707만 5,400km², 남북의 길이가 2,500~4,000km이고 동서가 9,000km에 달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구를 여덟 조각으로 나눈 빈대떡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 조각이 러시아가 차지하는 몫이다. 그래서 러시아 땅으로만 지구를 거의 한 바퀴를 돌고 러시아를 횡단하면 열 한 개의 시간대를 경험할 수 있다.
러시아라고 하면 또 어떠한 것들이 생각날까?
모스크바, 마트료쉬카, 소련, 톨스토이, 볼쇼이 발레, 시베리아 벌판 등 갖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우린 아직 러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 러시아에 대해 얘기를 하면 소련을 기억하시는 분들로부터 “러시아? 거기 소련 아니야? 빨갱이 나라.”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2000년대 들어와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시베리아 가스를 끌어오는 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우리에게는 러시아가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이 사실이다. 이에 러시아라는 숲을 다 보여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러시아를 정확히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 9회에 걸쳐 [러시아 읽기]를 연재한다.
[러시아 읽기] 6. 흐루쇼프부터 고르바쵸프까지..그들만의 정치
스탈린은 1930~40년대 간부들의 태도에 심각성을 느끼며 정치국원(당시 흐루쇼프, 베리야 등)이 소련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시기,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자가 공공 자금을 횡령하고 국가 재산을 도둑질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임원의 반 이상이 면직을 당하고 영국 및 미국의 제국주의와 연결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으로 기소되었다. 그들은 베리야의 추종자들이었다. 스탈린은 관료주의가 발생하는 원인이 “아래로부터의 비판의 부족”, “조직과 기관 활동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가 약화”된 것, “성취가 당의 대오에 자기만족적 경향을 낳”은 것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관료주의자들이 패거리를 만들어 자신들을 비판하는 인민들을 박해하고 희생시키고 있고, 결국 공산당 기구에 부패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실제로 관료주의자들은 권력을 이용해 기업과 토지를 사적 소유물로 만들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의 건강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차기 권력을 두고 세 집단이 있었다. 첫째, 스탈린을 이념적으로 계승할 안드레이 즈다노프였다. 그는 전쟁 동안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둘째는, 내무인민위원 라브렌티 베리야였다. 셋째는 흐루쇼프였다. 당시 베리야와 흐루쇼프는 관료주의(이후 수정주의) 세력을 대표했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스탈린 지도부의 핵심 성원이었던 즈다노프는 스탈린 사망하기 5년 전인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때 베리야, 즈다노프의 후임인 말렌코프 등이 계략을 꾸며 스탈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즈다노프와 함께한 간부들을 처벌하면서 레닌, 스탈린의 뜻을 이을 이들이 사라져갔다. 이 사건은 스탈린이 사망하면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관료주의가 지배하려는 움직임이 소련 사회에 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탈린이 사망한 3월 5일 당일, 중앙위원회, 각료회의, 최고회의 간부회의 합동회의는 베리야, 불가닌, 보로실로프, 카가노비치, 말렌코프, 미코얀, 몰로토프, 페르부힌, 사부로프, 흐루쇼프를 정회원으로 선출했다. 베리야는 국가원수 권한대행이었던 말렌코프를 소련 각료평의회 주석으로 추천했고, 말렌코프는 베리야를 부주석 및 내무성 장관과 국가 보안성의 장관으로 추천했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베리야는 정치 무대를 지배하며 스탈린의 비서, 즈다노프의 죽음을 조사하던 류민 등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도모했다. 스탈린까지 이어왔던 맑스-레닌주의 지도부는 관료주의자들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대대적으로 사라졌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친해지려는 흐루쇼프
1953년 4월 11일 각료회의의 한 포고령으로 각 산하 부서장들의 정책결정권이 강화되었다. 농업 부분, 공업 부분, 생산재 공업, 소비재 공업, 군부 등에 똬리를 튼 관료주의자들이 정부재원을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이들은 사회적 부가 아니라 개인적 부를 위해 싸웠다. 다시 말해 스탈린과 달리 흐루쇼프, 베리야 등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인민과 당, 국가를 분리해 자신들만의 소련으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흐루쇼프는 베리야 제거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는 먼저 베리야가 주석으로 추천한 말렌코프의 지원을 받아 개별적으로 다른 간부들과 대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접촉한 사람은 미코얀으로, 그는 베리야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1953년 6월 24일 최고회의 간부회의(정치국)가 소집되었고, 게오르기 주코프 국방장관 대리가 지휘하는 11명의 원수와 장군이 베리야를 체포하고 추종자들까지 처형했다.
1953년 9월에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장이 되었다.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가 열렸다. 흐루쇼프는 비밀연설로 스탈린을 격하하기 시작했다. 또한 제국주의와의 전쟁 불가피론이 부정되고 평화공존론,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 사회주의로의 혁명의 평화적 발전 가능성을 주장했다. 이에 스탈린과 가까이서 함께했던 카가노비치,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은 스탈린 격하 움직임에 분노해 1957년 6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흐루쇼프를 축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다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주코프의 힘을 이용해 다수표를 얻었고 그를 축출하고자 했던 이들은 ‘반당집단’이라는 오명이 붙은 채 당에서 제명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흐루쇼프는 1957년 10월에 주코프마저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했다. 그렇게 1958년 3월 각료평의회 주석인 불가닌까지 밀어내고 흐루쇼프는 주석이 되어 당권뿐만 아니라 정부도 완전히 틀어쥐었다. 그리고 흐루쇼프는 스탈린과 다르게 어떠한 논의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권 방식은 이후 소련의 지도자였던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 집권 시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적대하는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인민이었다. 인민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쟁피해 복구, 경제 성장을 자신들의 힘으로 빠르게 이뤄냈다. 특히 레닌, 스탈린이 지도자로 있을 때 교육, 토론 등으로 소련 사회의 주체가 된 인민들이었다. 지도자와 당, 국가, 인민이 하나 되어 당시 소련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 있었다. 그래서 흐루쇼프를 비롯한 많은 소련의 관료주의자들은 인민의 요구를 억압하고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돌려 인민을 정치로부터 고립시키고자 했다.
둘째는 스탈린의 뜻을 잇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인민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사상으로 하나 되어 인민들의 요구를 실현하려 했다. 그래서 흐루쇼프 등은 이들을 매우 위험한 최대의 정적으로 간주했다.
셋째는 국외에 있는 맑스-레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소련 내 스탈린 세력과 단단히 결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맑스-레닌주의 사상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이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흐루쇼프를 지지하는 세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물론 자신들과 같은 관료세력들이었다.
둘째는 여전히 존재하는 멘셰비키, 트로츠키파, 부하린파, 사민주의 등 스탈린에 의해 청산된 기회주의 세력이었다. 흐루쇼프 등은 기회주의 세력을 끌어모아 맑스-레닌주의 사상을 왜곡해야 한다고 보았다.
셋째로 국외 자본주의 나라에 있는 사민주의 세력과 연대를 강조했다. 그리고 타협하고 중립화하고 제한적으로 제휴할 세력은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국내에서 반인민적 정책을 써야 자신들의 이익을 독점적으로 유지할 수 있고, 제국주의자들과 충돌하면 제국주의자들과 인민들에게 포위될 것이기에 제국주의에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보았다.
▲ 케네디와 흐루쇼프
흐루쇼프는 1956년부터 1964년에 걸쳐 경제, 문화, 외교 분야에서 스탈린 시대와는 달리 인민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경제 분야에서 보면 생산력이 계속해서 감소하는 농업 문제를 옥수수 증산과 황무지 개간 정책, 새로운 농업기술의 도입 등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또한 스탈린 시대의 중공업에서 벗어나 경공업 위주의 산업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흐루쇼프와 관료들이 독단적으로 결정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자 국가적 관리에서 벗어나 관료들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확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59년 제1차 경제 개발 7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1960년엔 20년 내 미국을 따라잡겠다며 경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63년 기근으로 소련 경제에 큰 타격이 있었고 집단농장은 인민의 것이 아니라 관료들의 것으로 바뀌어 현금화되지 않는 노동은 불필요한 노동으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흐루쇼프의 경제 개혁은 사회주의 사회와 인민을 파편화했다. 그리고 ‘흐루쇼프카’라고 명명된 5~9층 아파트를 대량으로 지어 무상으로 배당해 환심을 얻으려 했지만 노후화와 관리 미흡으로 인민들의 불만이 더 높아졌다.
흐루쇼프는 1955년부터 서방과의 무역, 문화 교류를 증대하려고 노력하는 등 친서방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물론 1956년 반소련적인 헝가리 봉기를 유혈 진압하면서 관계가 다시 악화되었지만 흐루쇼프는 1958년 핵실험 금지 협상을 시작하고 이듬해 미국을 방문하는 등 친서방 정책에 노력을 기했다. 그러다 미국이 U-2 정찰기를 보내는 행위를 이어가고 있었던 상황에 1960년 U-2기가 소련 방공망에 걸려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정찰 행위를 비판했으나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비난을 자제했다. 특히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사과하기를 거부했음에도 1961년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와 회담을 하며 미국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몰두해 있었다. 이러한 흐루쇼프의 친서방적 움직임에 소련 내에서 국내 기관 재배치 문제가 대두하고 22차 소련공산당 당대회에서 비판이 이어졌다.
위기의식을 느낀 흐루쇼프는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쿠바의 신생 공산 정권인 카스트로 정권을 보호해 서방 세계와의 협상 근거로 쓰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다. 1959년 쿠바 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 쿠바는 실질적으로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에 카스트로 형제, 체 게바라 등의 혁명가들이 미국과 싸워 쿠바를 해방했다. 1962년 흐루쇼프는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여 쿠바에 핵미사일을 포함한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흐루쇼프의 계획대로 미국이 쿠바를 봉쇄해 소련의 배를 막으면서 미국과 협상할 기회가 만들어졌다. 흐루쇼프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만나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듬해 케네디가 암살당하며 미국과의 협상 통로가 사라져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다시 침체했다.
스탈린 집권 시기에 사회주의로 하나 된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많은 사회주의 진영은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손을 끊기 시작했다. 인민을 위함이 아닌 자신과 관료들의 이익을 우선한 흐루쇼프였다. 이에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이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중심으로 각료평의회 제1부주석 알렉세이 코시긴을 비롯한 간부들이 가담해 1963년 흐루쇼프 추방 계획을 짰다. 끝내 1964년 10월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회의 불신임투표로 당과 정부에서 흐루쇼프를 실각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서기장), 코시긴이 수상에 올랐다.
미국과 데탕트를 이루고자 한 브레즈네프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정책과 스탈린 격하운동을 원점으로 되돌리겠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지도자가 되면서 일을 그 반대로 했다. 흐루쇼프의 지지를 받아 소련 지도부의 간부가 된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가 시행한 정책 중 상당수를 유지했고 흐루쇼프가 공산당원으로서 1966년까지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남을 수 있게 허용했다. 그리고 흐루쇼프 때와 인민을 대하는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권력의 최정상이 된 브레즈네프는 곧바로 미국과 데탕트(적대 관계에 있던 두 진영이나 국가들 사이에 지속하던 긴장이 풀려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태 또는 그것을 지향하는 정책)시대를 열어 서방의 기술, 자본의 유치를 통해 경제를 회복하고자 했다.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 조인, 1969년 미국의 ‘닉슨독트린’ 발표, 1970년 제1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교섭 등으로 긴장 완화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다. 1970년 8월엔 자본주의 진영인 서독과 소련의 불가침협정,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1973년 동서독 국제연합 동시 가입 등으로 데탕트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소련의 경기 침체는 심각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이를 무시한 채 1979년 6월에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와 제2차 전략무기제한 협정을 조인하는 등 국제적 정상회담 운영에 집중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와 관료들의 생각과는 달리 서방 세계는 소련으로의 기술이전이 기울어져 가는 소련의 경제와 군사 능력 제고에 도움만 줄 뿐이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방 세계가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군사원조를 비난하면서 브레즈네프의 데탕트 형성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미국의 곡물 거래 정지부터 군비 확장 경쟁으로 막대한 군사비가 지출되었다. 이렇게 소련의 사회가 무너지기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1982년 11월 11일 브레즈네프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어간 안드로포프와 처음부터 병고에 시달리다 간 체르넨코가 그 뒤를 이었다. 결국 체르넨코를 보좌하며 개혁파로 이름을 알리고 다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소련 해체 균열은 고르바초프가 터뜨렸다
▲ 고르바쵸프와 레이건
고르바초프는 체르넨코를 보좌하던 당시 캐나다와 영국 등을 방문했고 영국의 수상인 마가렛 대처로부터 “그(고르바초프)와 함께라면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소련공산당을 페레스트로이카(재건, 개조, 재교육)의 장애물로 보고 당을 약화하기 위해 빠른 정치 개조를 강행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을 약화하기 위해 반스탈린 운동을 시작했다. 1987~88년 두 차례에 걸쳐 고르바초프와 그에게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야코블레프는 언론이 당 역사를 수정하도록 대대적인 활동을 했다. 이는 흐루쇼프가 1956년과 1961년에 당내 반발에 맞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실패를 축소, 은폐하기 위해서 소비에트의 통계가 체계적으로 위조되었고 스탈린의 정책을 유지하는 게 위기의 근본이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고 주장하는 악의적인 기사들을 제작, 유포했다. 그리고 1987년 2월 언론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방송을 하도록 결정했다. 이로써 고르바초프는 인민들에게 왜곡된 생각을 심어주어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연합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 연합은 사회주의를 개선하기 위해 스탈린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부인하기 위해 스탈린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함께 형성해나갔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던 초기,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와 소련공산당 등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특성을 도입해 소련 형성 이전 불평등을 초래했던 사유재산 제도를 부활했다. 또한 경제적으로 서방권 대기업들과의 경제 협력을 시작했다. 여기에 힘입은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공개, 홍보)이라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에 이어 친서방 정책을 이어갔다. 미국과 다시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1985년 11월 스위스에서,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에서 미국 대통령 레이건과 자리를 가졌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전략 핵무기 감축(START) 등 많은 부분에서 합의를 이뤄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레이건에게 스타워즈 계획 폐기를 요구했으나, 레이건이 받아들이지 않아 회담은 결렬되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만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그 결과 이듬해 중거리핵무기폐기협정(INF)을 체결하고 1989년 몰타 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냉전 종결을 선언했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부터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요청으로 주둔하던 소련군을 완전히 철수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를 바꾼다는 명목으로 1990년에 소련공산당 1당 집권 체제 대신 복수 정당제와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흐루쇼프 때부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에 이르기까지 집권층의 이익을 위한 대내외 정책들을 추진하면서 부정부패가 늘어만 갔다. 그리고 더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각 공화국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은 소수 민족의 분리독립운동과 소련 내 공화국의 봉기, 독립 등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4월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소련의 관료주의 체제의 무능이 떠오르며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소련공산당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1986년 12월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고르바초프의 부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사하로프는 젊은 나이에 소련과학원의 원사로 자라 소련핵물리학의 권위자였던 쿠르차토프를 뒤이을 과학자로 칭해졌다. 당시 소련은 사하로프가 마음껏 과학연구사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온갖 조건과 편의를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사하로프의 아내인 엘레나와 서방에 살고 있던 아내의 친척들이 자본주의 우월성을 자주 얘기하면서 사하로프는 자본주의 환상에 사로잡혀 점차 소련 인민들이 피 흘려 쟁취한 전취물들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점점 커져 사하로프 자신의 연구 성과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사하로프는 소련 사회에 대한 거부감이 머릿속에 꽉 들어찬 채 인권 옹호라는 간판 아래 소련을 반대하는 단체를 조직했다. 사하로프는 반인민, 반혁명적, 반소련적 활동에 가담한 것으로 지방으로 추방되었고 그때 노골적으로 서방 국가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후에 사하로프는 소련공산당의 영도적 지위와 역할문제를 규정한 소련 헌법을 폐기하라며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파업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솔제니친과 마찬가지로 소련을 호시탐탐 노리는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살아온 인사였다.
1991년 3월 17일 소련 존속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약 1억 2천만 명)의 77.85%가 개혁된 소련 유지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석 달 후인 6월 12일 러시아 최초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개혁적이라고 인식되는 보리스 옐친이 58.6%의 지지율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옐친과 친서방적 인사들은 소련이 점점 여러 독립국으로 분열되어도 시장경제로 급속히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중앙집권화된 권력 구조를 바꿔 소련을 대통령, 국방, 외교에 국한해 연방에 위임하는 주권국들의 연합으로 바꾼다는 내용의 신연방조약을 만들어 연방 붕괴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야나예프 소련 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은 신연방조약을 반대하며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조직해 1991년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크림반도에 연금했다. 이들은 모든 정치 활동을 엄금하고 대부분 신문 및 언론 운영을 중단하는 긴급조치를 발령했다. 하지만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과 친서방적 인사들은 이를 비난하며 전 소련 인민에게 파업을 촉구하고 서방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이전과 다른 소련을 원했던 사람들이 모여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막아 나섰다. 끝내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실패했고 주모자들은 전원 체포되어 모든 권력을 잃었다.
1991년 8월 23일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회담을 열고 둘이 소련을 함께 통치하는 데 합의했다. 다음 날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연방정부 내 모든 공산당 조직을 해체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국가들은 독립선언을 이어가고 있었고 끝내 8월 29일 최고 소비에트가 소련 영토 내에서 공산당 활동을 무기한 중단하면서 소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소련을 일부 제한된 규모로라도 유지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12월 8일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개 공화국의 정상이 비밀리에 만나 소련은 여러 이유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를 독립국가연합(CIS)이 이어받았다고 합의한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했다.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대통령직으로서의 활동을 중지한다”라며 소련 대통령직 사임을 밝혔다. 또한 연방내각을 해체하고 모든 권력을 옐친에게 양도했다. 이날 오후 7시 32분 고르바초프가 크렘린을 떠나는 순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갔다. 그리고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 연방회의의 소련 및 연방회의 해체 투표를 거치며 소련은 사라졌다.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일각에서는 흐루쇼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이어진 ‘스탈린주의’를 이용한 비난이 나오는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의 독재로 수많은 이가 죽었고 경제는 침체했다는 맥락의 이야기다. 이런 주장은 역사에 대한 구체적이고 과학적 분석을 포기한 사람들의 최고의 정신 승리의 표현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스탈린 사후의 집권층이 인민들을 움직여 소련을 이끌어 가고자 했던 스탈린을 격하하고 사실과 무관한 수치들로 과장과 왜곡, 거짓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까지 지도자와 인민이 사상적으로 하나 되어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 내 수억, 수십억 진보적 인류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전진을 이룩하고 있었다. 반면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스탈린 사후 소련은 교육, 노동, 토론, 회의 등을 통해 인민과 사상적으로 하나 되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집권층의 이익을 추구해 나아갔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기지였던 소비에트 체제의 해체는 제국주의와의 타협 등을 통한 외부적 공세도 원인이지만 스탈린 이후를 이끌어간 관료주의(수정주의, 기회주의)적 지도부가 초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편은 옐친에 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