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요모순

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

본문 요지
비정규직문제는 오늘날 한국사회 최대 계급인 노동자계급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라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는 일반적인 신자유주의 현상이 아닌 한국적 특징을 지니며, 그 본질은 ‘재벌문제’이다. 한국 재벌은 선진국 자본에 비해 기술과 자본 면에서 상대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정규직을 의식적으로 양산하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장차 한국의 재벌체제를 끝장 낼 ‘무덤 파는 자’라 할 수 있다.

2. ‘이론 구체화’와 한국의 주요모순
1) 외국 사례 (지난 호 게제)

2) 한국의 주요모순

 

오늘날 한국사회에 있어 주요모순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문제이다. 그 이유는 비정규직문제가 현재 한국사회 최대 계급인 노동자계급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문제는 우선 한국사회 최대 계급인 노동자계급 내에서 절대 다수의 가장 절박한 현안문제가 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처우에 있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동일노동을 하더라도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에 비해 절반 내지 심지어는 1/3 이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또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은 신분상 보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언제든지 쉽게 해고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리고 일단 해고될 경우, 비정규직은 사회 안전판의 부실로 인해 곧장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처럼 노동조건이 지극히 열악한 비정규직 비중의 확대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도 결코 유리할 게 없다. 그들도 고용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며, 자본과의 교섭력은 현저하게 약화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더 나은 생활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시간이 흐를수록 전반적인 상황은 악화되게 된다. 자본은 이 같은 비정규직의 대규모 존재를 통해 노동자들의 저항을 손쉽게 무력화시키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분할 통치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비정규직문제는 이제 한국 노동운동의 최대 현안문제가 되었다.

다음으로, 비정규직문제는 전체 한국사회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가 되었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이미 2100만 명을 넘어섰는데, 그 중에서도 비정규직은 그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수적으로 대략 1100만 명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직 집단은 한국의 단일 사회계층으로서는 최대라 할 수 있으며, 비정규직문제는 이 때문에 한국사회 전체로 볼 때도 최대 다수집단의 문제라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비정규직문제는 오늘날 한국사회 전반의 빈곤화와 빈부격차 심화, 이로부터 계층 간 갈등의 가장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4대 보험 등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위치함으로써 사회 전반의 복지수준을 현격히 떨어뜨린다. 그리고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때문에 한국사회의 갈등과 불안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중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앞으로 예상되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요인으로 성장동력 쇠퇴, 심각한 가계부채, 그리고 ‘사회적 양극화’를 손꼽는다. 이들 세 가지 요인의 많은 부분은 비정규직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

비정규직문제는 또한 다른 사회문제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교육과 청년실업, 남녀 성차별 문제 등이 그러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청년실업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데, 그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또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이 일찍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은 복잡한 교육문제를 야기한다. 그밖에 최근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 역시도 비정규직문제와 상당부분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직장 내 성폭력은 상 하급 간의 신분 차이를 매개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정규직 상사와 비정규직 하급자 간의 심각한 차별은 그 같은 성폭력이 보다 손쉽게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1)
비정규직문제는 이처럼 전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거의 매일 같이 보도되는 처참한 산재사고의 희생자는 대부분이 비정규직들이다.

열악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0년대 들어서 한국 노동운동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77일간의 옥쇄파업 이후 노동운동에 있어 투쟁의 주력은 확실히 대공장 정규직에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이동하였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이 대부분 비정규직투쟁이라는 점만 보아도 이 같은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지금 한국 ‘비정규직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래야만 투쟁의 대상을 제대로 찾아 올바른 싸움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 비정규직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혹자는 ‘신자유주의’를 그 원흉으로 지목한다.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현상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황당하고 무책임한 말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계 자본가계급을 상대로 싸우는 길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 같은 ‘신자유주의 책임론’은 그동안 한국의 비정규직투쟁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끔 만들었으며, 갖가지 기회주의의 도피처를 제공하였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싸워야할 적은 모호해졌으며, 투쟁주체들로 하여금 ‘정규직화’라는 눈앞의 요구에만 매몰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는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한국만큼 비정규직문제가 심각한 사회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한국은 앞서 언급한 대로 전체 노동자계급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999년 이미 비정규직 비중이 52%에 달했다.2) 또 제조업과 유통·서비스 및 공공부문을 막론하고 거의 전 업종에 걸쳐서 비정규직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특히 전통적인 제조업분야라 할 수 있는 자동차·조선·철강‧반도체 등에서 비정규직이 성행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유통이나 서비스업과는 달리 제조업은 원래 작업 형태에 있어 일정한 숙련이 요구되는 분야가 많고, 상대적으로 경기변동의 영향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용형태에 있어 상용직과 직접고용이 어울리며, 임시직이나 간접고용 같은 비정규직에는 적합치가 않다. 실제 서구 선진국의 경우 비정규직은 대부분 유통서비스와 같은 분야에 존재하며, 제조업에서의 비정규직 현상은 비교적 드물게 나타난다. 이에 비해 한국은 제조업분야에서 광범위한 비정규직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점은 한국 비정규직문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제조업 분야에서 ‘원-하청’ 관계의 탈을 쓴 위장 도급제, 불법파견과 같은 비정규직 고용이 널리 일상화된 지 오래이다. 최근에는 불법파견 논란을 피하기 위한 촉탁직 고용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제 한국의 원-하청 관계는 무엇이 본래 정상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규직 고용을 은폐하기 위한 것인지조차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변질되었다.

그간 ‘신자유주의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점들을 간과해 왔다. 실제로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과 같이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최근 들어 비록 과거보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얼마간 진척되었다고는 하나, 이 때문에 비정규직문제가 한국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나라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사회적 안정을 해치지 않는 선상에서 비정규직 비율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 국가들에 있어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비정규직 비중은 한국보다는 훨씬 낮다. 호주와 스페인 등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은 20% 미만이며 대체로 10%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유독 한국만이 50%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3)

그렇다면 한국보다 아직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다른 개발도상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비정규직문제가 신자유주의 탓이라고 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전 지구적 현상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보다 못사는 개도국에서도 비정규직문제가 한국처럼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갖가지 시위와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동남아나 남미 국가들에서, 정작 비정규직문제로 인한 사회소요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우리는 접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유가 있다. 이들 국가들이 아직 ‘산업화의 미비’로 인해 비정규직문제가 전체 사회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 나라는 여전히 농업인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국민이 한국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지지 못한다. 비정규직문제의 전면화는 한국처럼 산업화와 도시화가 일차적으로 마무리된 국가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도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는 한국적 특색을 지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 금속노조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지회 노조원들이 지난해 7월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범죄! 현대그린푸드 최저임금 도둑질! 범죄소굴 정몽구 일가 구속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금속노조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지회 노조원들이 지난해 7월 오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범죄! 현대그린푸드 최저임금 도둑질! 범죄소굴 정몽구 일가 구속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그렇다면 한국의 비정규직문제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재벌문제‘이다. 한국 재벌은 주지하다시피 대외 의존적인 수출주도형 경제를 상징한다. 때문에 그들은 해외시장에서 선진국 자본과 격렬한 경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선진국 자본에 비해 기술과 자본 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인 한국 재벌은 국내의 인적·물적 자원에 대한 초과 수탈과 착취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축적상의 특징이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비정규직문제가 출현하게끔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다.

한국 재벌체제와 비정규직문제의 관련성은 역사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재벌체제가 정식 수립 된지 얼마 되지 않은 1980년대 후반에 재벌들은 예기치 않은 큰 복병을 만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의 대규모 반란이다. 군사독재 하에서 집약적인 산업화로 인해 한국 노동자계급은 그간 양적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마침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중적 노동운동’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리하여 군사독재 하에서 유용했던 기존의 폭력적 노동탄압 방식은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다. 이제 좀 더 세련된 ‘경제 내적’ 방식으로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신 경영전략’이라 부르는 한국 자본의 노동전략 상의 일대 전환이다.

이 ‘신 경영전략’은 직무개편·연봉제 등 임금체계 변화, 비본질적 업무의 외주화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재벌들은 결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원래 정규직들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 업무까지도 외주화를 추진하였으며 비정규직 업무로 바꾸어 놓았다. 자동차와 조선업종에서 지금 성행하고 있는 도급 및 하청 관련한 업무들은 과거에는 많은 부분이 원청 정규직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던 것들이다. 이때부터 기존의 위계적이고 수탈적인 원-하청 관계에 더해, ‘사내하청’ 형식의 불법파견 같은 전반적인 비정규직화가 한국의 고용형태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외형상으로는 지구화시대의 신자유주의적 사조에 편승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1987년 대파업으로 야기된 노-자 간의 역관계의 변화를 반영한 한국 재벌의 착취방식에 있어서의 일대 전환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은 물론 제조업에만 치우쳐 있는 현상은 아니다. 유통·건설·공공운수 등 전 업종에 걸쳐 골고루 나타난다. 양적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이들 분야가 제조업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 역시도 우리가 ‘재벌체제’의 시각에서 본다면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재벌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제조업 분야에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주력 기업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제조업은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주요 영역이며, 이 때문에 제조업은 유통이나 공공 부문 등 다른 분야 자본운동의 기초를 제공하고 그 조건을 제약한다. 만약 한국 재벌체제 하에서 제조업의 전반적 이윤율이 낮다고 한다면, 유통이나 금융 등 다른 업종의 이윤율만이 특별히 높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 분야 역시도 저임금에 기초한 초과착취를 위해서 비정규직을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음으로, 유통업 역시도 한국 재벌이 지배하는 영역 중 하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재벌은 ‘문어발식 경영’이 보여주듯 유통과 건설 및 민간 공공부문(학교·병원·운수 등)까지 광범위하게 진출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재벌소속 백화점 3사의 시장점유율은 78%이며, 이마트·홈플러스·LG유플러스 등 대형마트 3사는 53%를 차지한다.

정부기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문제 역시도 같은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 명색이 국민의 복지와 고용 그리고 사회 안정에 앞장서야 할 정부가, 한국처럼 오히려 차별적이고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비정규직의 확장에 앞장서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이는 ‘재벌과두체제’ 하에서 재벌에 이미 포섭된 상부구조로서의 한국 국가권력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비정규직의 양산을 통해서 밖에 생존할 수 없는 한국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축적구조의 상부구조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비정규직문제의 본질이 바로 ‘재벌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재벌문제는 단순히 비정규직문제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이라는 사실이다. 이점은 오늘날 재벌문제가 한국사회 곳곳에 침투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재벌문제와 무관한 사회문제가 거의 없는 현실 속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다. 한국의 재벌들은 ‘글로벌 경영’이라는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여전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기반으로 삼아 비정규직을 양산시키고 있으며, 또한 천문학적인 가계부채 누적이 보여주는 서민대중 몰락의 진정한 원흉이다.

재벌체제는 한국의 각종 비리의 온상이자 공적체계를 무너뜨리고 비선조직의 번성을 낳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기도 하다. 최근의 국내정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탄핵정국의 직접적 계기가 된 ‘최순실 사건’도, 그 근원을 캐노라면 재벌문제와 관련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심각한 소수 재벌에의 경제력집중이 그 같은 사태를 잉태한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살아남은 상위 재벌들은 자신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계는 물론 사법·관료·언론·문화계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소위 ‘재벌장학생’을 육성할 정도로 무소불위한 힘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재벌체제야말로 비자금조성, 탈세, 뇌물공여, 회계조작, 정경유착 등 갖가지 부정부패와 범죄의 온상이다. 그밖에 청년실업문제, 교육문제, 심지어는 최근 대두되는 성차별 문제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 재벌문제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밖에, 한국 재벌의 대외 의존성은 한국사회 전반의 예속성의 물적 토대로 작용하며, ‘미국’으로 대표되는 현대제국주의 요소가 국내에서 관철하게끔 만드는 내적요인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재벌문제는 성격상 한국자본주의 축적체제와 관련된 근본문제이자, 당대 한국사회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을 규정하는 문제가 된다.4)

우리는 어느덧 비정규직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주요모순과 기본모순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주요모순과 기본모순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당 건설에 있어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인 재벌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1100만 명에 이르는 ‘반재벌’ 대군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현 재벌체제 하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생존의 위협과 고통을 받는 존재들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반재벌투쟁의 주력군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장차 한국의 재벌체제를 끝장 낼 ‘무덤 파는 자’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문제는 한국사회에 수많은 계급 갈등의 불씨를 뿌리며 또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든 폭발하게끔 만든다. 재벌이 기왕에 초과 착취의 수단으로 비정규직제도를 도입한 만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은 매우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일을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이들은 결국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한편 재벌의 입장에서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항을 결코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데, 만약 그들의 조직화를 그냥 방치할 경우 애초 자신들이 비정규직을 도입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하청 비정규직들은 일감몰수, 노조파괴, 계약사업주 교체, 하청매각, 재입사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원청 재벌 대기업의 막후 개입에 직면하게 되며, 재벌 혹은 그들 대리인인 하청업체에 맞서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투쟁이 장차 반재벌 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한국의 비정규직운동은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것의 ‘한 발짝 전진’이 힘든 만큼 반대급부로, 이 투쟁으로부터 훌륭한 투사들이 대거 배출되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정규직노조를 설립하고 자리 잡게 하는 투쟁은 지역과 공단을 오가는 수많은 선전전과 자택방문, 장기간 농성,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을 위한 법정투쟁 등 온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야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조합원 한명 한명은 잘만 훈련된다면 모두 훌륭한 반재벌 투사로 변신할 수 있다.

둘째, 비정규직문제를 매개로 정규직투쟁을 비롯한 각 사회영역에 흩어져 있는 광범위한 반재벌투쟁 역량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비정규직문제는 단지 비정규직 내부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정규직운동의 활성화와 사회 전반의 반재벌투쟁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국의 대외 종속적 축적체제 하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역시도 절대 안심할 수 없는 불안정한 고용상황과 관련된다. 지구화에 따른 개방화와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급속히 확산되는 가운데서, 그간 국내 인적자원 투자에 인색하고 그 수탈에만 철저히 앞장서 온 한국 재벌의입장에선 앞으로의 유일한 생존 대책은 지금보다도 더욱 철저한 ‘노동유연화’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것은 앞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이와 관련한 정규직의 대규모 비정규직화를 의미한다. 이 같은 상황은 결코 먼 미래가 아닌 ‘아주 가까운’ 시기에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정규직들은 장차 자신의 운명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문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본 측은 실제로 조금씩 저수지 물을 빼내듯 정규직을 서서히 고사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지금부터라도 이 같은 자본의 의도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이후 대공장 노조의 앞날은 매우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현 재벌체제 하에서 자본의 많은 전략이 비정규직제도를 십분 활용하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에, 지금 시기 대기업 정규직운동의 최대 현안문제는 다름 아닌 ‘비정규직문제’라 할 수 있다. 아직 정규직 본대에 대한 자본 측의 정면 공격이 시작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지만 그 준비공작이 착착 진행 중인 상황에서, 오직 비정규직문제에의 적극적 동참을 통해서만 정규직들은 이 같은 자본 측의 의도를 분쇄할 수 있다.

비슷한 원리를 우리는 향후 반재벌 전선에 동참할 사회운동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한국 변혁운동 진영에는 환경, 평화, 복지, 여성, 청년, 교육 등 노동운동 외의 다른 많은 영역이 존재한다. 이들 영역의 주체들 역시도 현재 한국사회 최대 현안이 된 비정규직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인 재벌문제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또 단순히 인식적 차원을 넘어서서 여기서도 부문운동 간 실질적 연대를 위한 주요 고리로써 비정규직투쟁이 활용될 수 있다. 이들 각 영역의 주체들은 비정규직투쟁에 대한 동참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장 첨예한 모순을 인식하게 되며, 자신의 선진분자들을 훈련시키고 그 내부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다.
이렇듯 주요모순인 비정규직문제를 매개로 한국사회 각 분야에 잠재된 거대한 반재벌 에너지를 모으고 폭발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본문 주석

1) 다음 기사 내용 참조.
“<한겨레>의 ‘미투 보도’를 보고 자신의 사례를 제보해 온 여성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라는 신분의 불안정성, 가해자가 승진이나 인사고과를 좌우하는 상사라는 점 등의 현실적 이유 탓에 적극적인 문제 제기를 꺼리게 된다고 털어놨다.” (한겨레신문, ‘유명인 미투’ 연대 번지는데…‘직장내 미투’는 숨죽여 운다, 2018년3월2일)

2) OECD, OECD Economic Surveys(Korea), 2000.9. (윤진호외 3인, <비정규노동자와 노동조합>, p40에서 재인용.) 2006년 민주노총에서 출간한 다른 연구 책자를 보면, 2004년 현재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56.7%로 파악된다.(윤진호 외 4인, <비정규노동자 조직화 방안 연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6년, p12.) 비정규직 관련한 정부발표 통계가 30%~40%대 초반으로 나타나는 것은 중간에 정부가 통계기준을 바꾸어 의도적으로 수치를 낮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 위의 OECD 통계 표 참조. 또 이와 관련해선 필자의 졸고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 위해 ②― 한국 특색의 비정규직문제”, http://www.redian.org/archive/120061 참조 바람. 서구와 한국이 비정규직과 관련한 법제상의 취지와 내용에 있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서구 선진국은 비정규직 관련 법률에 있어 한국과 달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권리보장을 도모하면서, 비정규직 사용을 가급적 억제하고자 하는 취지를 기본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정 반대로 비정규직의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의 확산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지향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이 기본모순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극소수 재벌 총수집단에 집중된 경제력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노동자계급 및 광범위한 민중과의 모순’이라고 진일보하게 규정할 수 있다. 원래 자본주의 기본모순이란 ‘생산의 사회화와 자본주의적 점유 간의 모순’을 지칭한다. 이 같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이 가장 성숙한 나라가 바로 재벌체제가 지배하는 한국이다. 기본모순의 성숙 정도는 다음의 양 측면을 통해 관측될 수 있다. 즉 한편에선 사회적 분업과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생산사회화가 고도화되는 정도이며, 다른 한편에선 이에 반해 생산수단과 생산물에 대한 자본주의적 점유가 더욱 사회 소수집단에게로 집중되는 정도에 의해서이다. 이 같은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위 양 측면의 대조가 가장 극명하고 첨예하게 나타나는 곳은 바로 재벌체제로 특징 지워지는 한국이다. 한편에선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세계적인 글로벌 경영을 하는 다국적기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총수일가가 극히 적은 소유지분만을 가지고서도 거대 기업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한국 재벌의 ‘특유한 소유와 경영의 괴리’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극소수 상위 재벌 중심의 ‘재벌과두체제’가 성립한 한국은 이 같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이 이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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